가을 수채화
화려함에 익숙해 있노라면 평범함의 진정한 매력을 제대로 읽어낼 재간이 없다. 자극적인 양념으로 공격당한 미각이 심심하게 조미한 음식의 담백함에 무덤덤해져 있듯. 또한, 소박함에 깃들여 있던 이에게 특별한 무언가는 쉬이 녹아든다. 나름이지만 특출 난 특성이 소박함을 이내 묻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서 익숙한 것들이 생소한 무언가를 평가하는 비교의 잣대가 된다. 봄이면 노랑 물감을 엎지른 듯 떼 지어 피어오르는 개나리 군락과 앙증맞은 철쭉이 그리웠고, 여름에는 반팔 소매를 입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니냐 의문 삼았으며(당시 독일은 한여름에도 반팔을 입을 만큼 더운 날이 극히 드물었다), 해님도 동면을 취하나 싶을 만큼 어둔 겨울이면 강추위에도 햇살 반짝이는 한국 겨울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특유한 풍광과 가장 많이 대비되는 계절은 단연 가을이었다. 단풍이 사방에서 물들고 있음에도 불구, 이 나라엔 침엽수가 많아 단풍이 안 드는구나 아쉬움을 안고 지낸 수년. 최근 들어서야 나 스스로 눈뜨고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독일의 가을은 화려하지 않다.
비도 잦다.
광대한 자연 중 자극적인 빛깔로 물드는 나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덕분에 불타오르는 듯한 한국의 단풍색과는 상반되는, 평범하며 다소 단조로운 풍광이 흐린 하늘 아래 차분하게 펼쳐진다.
내가 비교할 수 있는 한국의 사계는 십 대의 기억에서 멈춰 있었다. 그 기억 속 가을은 도로변에 피어오른 여린 코스모스의 손짓과 곧 타버릴 듯 열정적인 붉은 단풍 또는 눈부신 금빛의 은행나무 등 화려한 색채로 각인되어있었다. 그 위로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눈부신 가을 햇살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내게 가을은 새빨갛거나 샛노란 단풍과 더불어 햇살 가득한 푸른 계절이어야만 했다.
억지를 안고 지낸 세월이 길었던 만큼 화려한 단풍이 있는 풍경, 틀에 박힌 가을만 갈구했기에 검소하게 치장한 이 곳 가을 풍경은 내게 진정한 단풍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가을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음에도.
눈 앞에 매년 펼쳐지는 가을 수채화는 기억 속의 것과 명백히 다른 색감으로 탄생한다. 올해는 예외지만 대게 우울한 하늘 아래, 도드라진 색채 없이 온갖 나무들이 빛을 발하기보다는 빛이 바래간다는 표현이 적합한 풍광. 겨자색부터 갈색 계통에 이르는 다양한 색을 품고 있지만 과장 없는 평범함과 은은함이 보는 시선에 평온을 선사한다.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서로 조화로운 합을 맞추며 들판과 숲이 춤추며, 단풍으로 빛이 발하기보다는 빛이 바래간다는 표현이 적합한 풍경으로 변해간다. 햇살이 등장하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지는 소리를 낼 듯 마른 퇴색함.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감 있는 매력. 환한 웃음보다 따스한 눈길 한 번 더 건네주고 수줍은 미소처럼 다가오는 계절. 소박하게 부드럽고, 은은하게 따스한 빛깔의 풍경이 내 마음을 진즉 사로잡지 못한 이유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 뒤에 가리어진 탓도, 퇴색하는 가을을 음미할 만큼 내가 성숙하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계절을 즐기는 취향의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
수많은 고층건물에 번쩍이는 간판과 꺼지지 않는 불빛 속 야경,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의 열정이 가득한 서울. 그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듯 그 땅 위에서 전개되는 가을 또한 강렬하고, 눈부신 빛깔로 수 놓이는 건 어쩜 너무도 자연스러운 어울림일지도.
독일의 가을 역시 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참 많이 닮아있다. 디자인보다 기능성을 우선시해 무채색을 선호하는 이들의 손으로 일궈진 자연 역시 다운된 톤 위주의 차분한 매력을 뿜고 있으니 말이다. 외모 가꾸기에 관심 없는 이네들처럼 세련미는 빠진다. 무관심한 듯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처럼 나란히 어깨동무하며, 상대의 빛을 품고 있다. 주연 없는 조연들만의 이색적인 무대랄까? 전체를 위한 개인의 작은 희생이 만들어낸 사랑스러운 작품이랄까?
올해는 예외로 길고, 뜨거웠던 여름만큼 우울모드를 피해 화창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폭염 아래 바삭바삭 마른 소리가 더해진 나뭇잎들 위로 어느새 빗소리가 녹아든다. 서민들의 삶이 녹아든 듯 정겹게 바랜 단풍빛이 그 빗물에 녹아들어 간다. 빨리 타오른 만큼 쉬이 식는 열정보다 은근한 온기가 오래 머무르듯, 은은하기에 더욱 오랜 여운으로 남을 따뜻했던 가을을 기억하며, 다가올 모질고 긴 겨울을 덤덤히 맞이해보자 나지막이 다짐해본다. 그새 마음 한 켠에 온기가 가득 차오른다.
* 2019.10월호 수필문학지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