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시죠?
요즘 들어 위통이 심하다.
위에 탈이 나면 밀가루 음식을 자제하는 것이 나을 뿐 아니라 절로 피해지기 나름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외할머니의 찰진 손칼국수가 몹시도 구미를 당긴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즉시 체한 듯한 불쾌감과 꼬이는 듯한 위경련에 끼니를 굶다시피 하루를 보낸 탓일까?퇴근 후 지쳐 쓰러지듯 누웠노라니 문득 우리 외할미의 칼국수를 먹으면 나를 옳아 메는 육신의 고통과 곤함이 싸악 가실 것만 같다. 할미의 약손이 내 복부를 따뜻하게 쓸어내리며 위통을 달래줄 것만 같다.
독일 온 이래 먹을 기회가 없었으니 이미 30년을 훌쩍 넘긴 기억 속 그 맛. 그럼에도 나는 그 정성 가득한 손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학창 시절 방과 후 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너른 거실 바닥에서 칼국수 면을 반죽하고 계시는 할머니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 나는 제일 행복했다. 책가방을 내던져놓고 할머니 앞에 바짝 앉아 할머니의 마술 속으로 빠져들었다. 흰 눈 보다 고운 밀가루 분말이 변해가는 과정은 과히 놀랍게 나를 매료시켰다. 밀가루는 두리뭉실한 뭉치로, 이는 또다시 커다란 대형 피자만큼 넓은 밀가루 피로 변했고, 몇 겹으로 말린 상태에서 할머니의 빠른 손놀림에 의해 고운 면발로 재탄생되었다.
그 시절에는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는 주방이 아니 거실에서 항상 손칼국수를 빚으셨다. 신문지 넓게 펴놓고, 반죽 위로 밀가루를 살짝살짝 뿌려가며 방망이로 반죽덩어리가 보자기처럼 얇게 변하기까지 주물고, 펴고 하기를 반복하시기에는 아무래도 바닥이 편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적당한 굵기의 면이 완성되면 할머니는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후딱 멋진 칼국수 요리로 완성해 우리의 입을 즐겁게, 우리의 위를 행복하게 해주셨는데...
우리가 귀가하기 전 만들어 놓은 정갈하고, 깔짬한 할미 명인표 양념장 하나면 칼국수 한 대접 눈 깜짝할 새 비워버리곤 했던 그때가, 손녀들을 위해 정성껏 맛난 상을 차려주시던 우리 할머니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당시 외부 활동이 많으셨던 엄마가 방과 후 우리를 집에서 맞아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셨기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우울하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존재가 주는 의미는 매우 든든한 것이다.
"할미, 나 칼국수 먹고 싶어."
"그게 그렇게 맛있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아마도 할머니는 우리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번 은근히 우리에게 인정받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맛나다는 화답과 함께 흔쾌히 응하신다, "내일 당장 해줄게, 우리 새끼가 먹고 싶다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 때마다 들르는 국숫집이 있다. 뽀얀 사골국물의 고소함과 쫀득한 면발이 일품인.
그곳은 한국땅을 밟을 때마다 내게 필수코스다. 잠재 속에 어쩌면 나는 그 국수로 할미가 해주신 손칼국수에 대한 오랜 향수를 달래려는 것이 아닐까? 워낙 국수를 좋아하다 보니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그 국수가 내 기억 속 할미가 손수 빚어주신 칼국수와 가장 근접한 특성을 지닌다. 할미의 칼국수와 이 국시의 가장 큰 차이는 국물이다. 사골국물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깊숙히 입맛을 감싸주던 국물의 담백함과 얇고 섬세한 면발의 쫀득함이 매우 유사하다. 호박채 살짝 올린 것 외엔 고명도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까지도. 맛은 서울의 유명하다는 그 어느 국수집보다 뛰어났다. 특별한 재료나 비법이 있어서가 아닌 오랜 경륜의 손맛과 손녀들을 생각하며 최고의 정성을 담아 만드신 할머니의 사랑이 양념되어서가 아닐까?
그 손맛을 더 이상 누릴 수가 없다.
그 마법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
그 사랑, 내 가슴이 기억할 뿐이다.
그리움으로 묻고, 추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 깊고, 따뜻한 할머니의 외골수적인 사랑이 있어 오늘도 내 가슴은 흐뭇하고, 내일을 살아가는 위로를 받는 것이니...
할머니도 투정 부리던 내가 가끔 그리우실까?
칼국수를 빙자해 할미가 몹시도 그립던 하루. 무심코 달력을 들춰보니 며칠 전 할미의 생신을 놓치고 지났구나...
"할미, 그 곳에서 평안하시죠?"
그리움은 잊혀진 듯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