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한 이방인 Mar 10. 2018

아픈 손가락

너라는 존재의 의미

지난 연말 우리 부부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휴가를 다녀왔다. 처음으로 셋이 떠난 휴가였기에 깊은 의미와 긴 여운이 남았다.


애초에는 매년 그랬듯 고향 나들이를 다녀올 참이었지만 긴 휴가 사용이  녹록지 않았다.

어쨌건 우리는 짧게나마 독일을 떠야만 했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가장 쓸쓸하고, 외국사는 게 실감 나는 시기임을 잊게 해 줄 만한 곳으로.


지난해는 왜인지 막내가 유난히 마음에 밟혔다.

여러모로 길고 긴 시련의 연장선상에 선 채  계약직에서 정규직 자리를 꾀차느냐,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느냐 갈림길에 선 시기, 수년간 고비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며 쉴 틈 없이 달려온 막내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목적지를 결정하고 수차례 동행 의향을 물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자기 의사가 깔끔한 성격이지만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것 같은 상황에서는 극히 소심 해지는 면모를 드러내는 아이.


더 이상 지체하기에 늦은 시기, 급히 찾은 여행사에서 다행히 원하는 목적지 상품이 소수 남아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아직 퇴근 전일 막내에게 메시지를 넣어 본다.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한다고. 종일 교육이라더니 연락이 없다, 여행사 영업시간은 다 끝나 가는데...

조급하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예상한 대로 망설임이 크다.

하지만 함께이고 싶은 속마음이 충분히 읽혔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전화가 아닌 문자로 거절 의사를 전했을 아이였음을 알기에.


"무조건 휴가 내!

  자리가 거의 다 차서 더 미룰 수가 없어.

  세 명 예약한다!"

명령조로 통보했다.

"...."

"...."

잠깐의 정적이 깨진다.

"나 진짜 따라가도 돼?"

뒤골이 뻐근하다.

나 스스로에게 한 방을 먹은 기분이랄까?


어디를 가던  매년 막내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솔직히 가볍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친구들이 많고, 연말마다 무숙자 봉사에 의미를 두는 아이인지라 나름 좋은 시간을 보내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란, 한 켠의 무거움을 털어 내기 위해 나 스스로 만들어낸  핑계 인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싸해져 온다...

늘 혼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혼자가 아니래도 마음에 밟혔던 너를, 내가 편하자고, 나 덜 외롭고자 외면한 채 살아온 게 사실이란 걸 인정해야만 했기에... 그렇다, 매년 이 맘 때마다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연말마다 막내가 수많은 친구들에게 파묻혀서도 단 하나의 피붙이 없이 수년간 혼자 삭힌 외로움, 그 누적된 무게가 한순간 나를 삼켜버리는 듯하다. 미안함에 호흡이 가빠지는 동시에 애써 속마음을 드러내 준 게 사뭇 기뻤다.


그렇게 셋이서 떠난 휴가. 

생소하리만치 들뜬 막내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아주 자그마한 섬이 전부인 곳에서 우리는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

언니와 형부에게 안긴 부담이 크다고 미안해하던 막내가 어느새 우리만의 휴가에 한껏 심취해있음을 보니 뿌듯했다. 수영은 잘 해도 처음 시도해보는 스노클링이 다소 두려운 막내,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피는 남편. 얼룩지게 탄 얼굴 보며 서로가 놀림 대상이 되어 깔깔거리는 둘을 보고 있자니 행복했다. 막내와 남편에게서 아빠와 딸의 모습을 보았고, 셋이 하루 24시간을 함께 웃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 진정한 가족이 아닌가 감사했다.

아빠와 딸 같은 막내와 남편

그렇다, 이 막냇동생이 내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다. 자식이 없어 부모님의 마음을 온전히 다 헤아리지 못하는 불효자지만 그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이런 게 부모님의 마음이겠구나"를 살포시나마 깨닫게 해주는 존재.

한없이 챙겨주고픈 딸 같기도, 때로는 친구이자, 언니같이 듬직한 내겐 절대적인 존재.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그 생명의 존재를 안 후부터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그 존재가 창피했었다. 부모님께는  내색할 수 없었으나 바야흐로 "아들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국가의 장려정책이던 시대에 내겐 이미 둘이나 되는 (여)동생이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남아 선호 사상이 심하던 당시 많은 이들이 "부모님이 아들 낳고 싶으셨나 보네?" 선입견을 갖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가을이기엔 공기가 뜨겁던 시월 중순 어느 하루. 붉게 저녁 하늘이 물들어 가는 시간, 자율학습 후 달려간 동네 병원에서 이 아이와 첫 대면을 했다. 갓 태어나 터질 듯 불덩이 같은 형체가 다소 두려웠다. 내 생애 처음 보는 갓난아이인지라 건드려서는 안 될 의문의 미완성체 같이 여겨졌다. 그런데 눈도 뜨지 못한 작은 생명체가 입을 오물거리며 내게 대화를 시도하는 듯 묘하게 끌렸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 순간 그간 품었던 모든 부정적 감정이 따뜻한 햇살에 눈 녹아내리듯 소리 소문 없이 행방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겨졌던 존재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한결같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렇게 늦둥이로 태어나 집안의 온갖 예쁨을 받던 막내의 순탄한 삶은 야속하게도 너무 빨리 저물었다. 내가 세 살, 다섯 살 터울 두 동생과 누린 유복함과는 달리, 하늘은 유독 막내에게는 인색했다. 이상하다 싶을 만치...


초등학교 문 넘은 지 얼마 안돼 언니들 사는 독일행을 결심한 엄마 손에  붙잡힌 채 영문도 모르고 독일로 와야 했고, 언어적 장애를 겨우 넘어서니 집안 가세가 기울어 독일을 등지셔야 한 부모님과 생이별한 채 경제적 기반도 다지지 못한 언니들 품으로 넘겨졌다.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 아빠없이 살아내야 하는 하루하루의 무게 탓이었을까, 투정부리는 게 너무 큰 포사로움이라 여긴 탓일까?엄마와 아빠가 보고싶다는 투정 한 번 안 부리던 막내에게 떨어져 산 세월의 길이 만큼 부모님의 품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차차 희미해져감이 감지되었다. 그래서인지 큰 형부가 아빠를 대신하는 존재라 여겼고, 남편에게서 아빠의 사랑을 대신 찾곤 한다.

휴가를 떠나며 공항에서 남편과 막내

그렇게 어려서부터 눈치가 백 단이 되어버린 아이.

중고등 학반을 다니며 친구들 따라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단 한 번 떼쓴 적도,  용돈 타령한 적 없이 스스로 용돈 마련하고, 자기 앞가림하며 수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혼자 훌쩍 자라난 한 떨기 들꽃처럼 피어오른 아이.


나는 그 어른스러움이 싫었다.

그 지나친 의젓함이 쓰라렸다.

혼자 감내하는 모습이 아팠다.

어느새 삼십년 전... 그립던 막내와 여름방학동안 재회

하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우리도 살기 바쁜 시기였기에 사고 치지 않고, 혼자 잘 자라주는게 다행이라고만 여겨온 시절이기에.

일찍이 부모님의 보호구역에서 유탈 한 채 거친  세상살이를 터득한 덕인지 막내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버텨냈고, 지금 그 자리에 올라선 것 같아 한편으로는 이 쓰라림도 감사함이다.


어려서부터 "갖고 싶다", "하고 싶다", "가고 싶다"라는 바람을 표현하면 안 되는 처지라 여긴 채 살아와서일까? 이제는 조금씩 욕심내도 될 것들에조차 스스로 인색해진 모습. 사소한 것임에도 자신이 탐해도 되는지 확신없어 하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앞으로 소박하게, 찬찬히 자신의 마음속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기를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


어떤 시련에서도 자신보다 내가 걱정할까봐 나를 더욱 위로하는 아이지만 가까이 있는 유일한 피붙이이기에 내게만큼은 자신이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 들킬 수 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고, 그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왔는지 아직도 생생하기에 나는 그 손가락이 여전히 쓰리다. 왜 유독 저 아이의 인생이 평탄치 않나 하늘이 몹시 야속했던 날들이 지치도록 길었던 것도 사실. 그런 와중에도 막내는 기도하길 멈추지 않았고, 절망 속에서도 기적처럼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곤 했다. 


연말 휴가가 터닝포인트가 된 양, 그 후 모든 상황이 뒤바뀌어 간다. 속상한 소식이 빈번했던 녀석에게 드디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소식은 바라던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고, 혼자였던 그 아이 옆에 든든하고 착한 남자 친구도 생겼다.


'왜 너는 한창 피어야 할 나이에 자꾸 내리막길로 치닫니?' 속상한 마음으로 늘 체기를 느끼던 중, 막내의 오랜 소망이 하나 두울 이루어지는 걸 체험하니 그제서야 온 깨달음; 시련은 이겨낼 자에게만 허락되며, 시련과 고난의 무게만큼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는 진리의 말씀!


너에게 나즈막히 속삭임을 건넨다;

"넌 내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지만 너와 함께 걸어온 날들 중 너로 인해 기쁜 날이 더 많았고, 너로 인해 더 활짝 웃을 수 있었음을 감사해~

나의 아픈 손가락, 이제는 나의 기도제목처럼 크게 날갯짓하며 높이 높이 날아오르려무나. 우리가 항상 변함없이 응원하며 지켜봐 줄게."


"고마워, 내 동생으로 나를 찾아와 주어서.

 너의 인생에 우리가 함께일 수 있어 행복해♡"

언제나 그러했듯 앞으로도 함께 가자!

"그리고 많이 사랑해!"

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일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