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따사했던 가을
올여름은 길고, 강열했다.
지독하게 메마르고, 따가웠다.
그래도 그저 좋았다.
그 여름의 화끈함이,
그 메마른 반짝임이
마냥 좋았다.
독일 온 이래 맞이한 최고의 여름이었다.
태양이 매일마다 과하게 웃어도,
한낮 송글 맺힌 땀 식혀줄 바람 한 줄기 없어도,
폭염의 수준을 방불했던 시기였으나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했고, 불쾌감 없이 있는 그대로 즐기기에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름에 제대로 홀려버렸다.
비 한 번 제대로 내려주지 않아 습한 기운이 자제된 상태에서 건조한 더위로만 이어진 덕이었고, 내 삶의 터전이 푸른 자연이 뿜어내는 청량함 가득한 곳인 이점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다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제대로 화끈한 맛을 보여준 2018년 독일의 여름. 자신하건대 많은 이들에게 올해가 오래 기억될 주요 사건일 것이다!
강열한 여름의 임팩트 덕에 가을 오는 소리 두렵던 마음이 사라졌다. 인지하지 못한 새 계절이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들었고,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여름의 시퍼런 기상이 서서히 물러가며, 남겨놓은 올해 최고의 선물을 건네받았다.
진정 대단한 선물이었다.
바로 가을이라는 계절이다.
분명 매년 맞이하던 가을과는 확연히 다른, 살갑도록 따사롭고, 여름의 메마름을 그대로 간직한, 독일에서 무척 생소한 특성을 지닌 가을이었다.
길었던 여름의 화창함 덕에 가을을 넘어, 겨울로 접어든 후에도 시간 감각조차 놓친 채 한 해의 끄트막에 서있는 지금. 여름이 저물며 해의 길이가 짧아지는 동안에도 계절의 변화 앞에 예민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만 여겨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여태 믿기지가 않는다.
올해는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가 예년과는 달리 구슬프지도, 침울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서는 계절의 흐름 또한 매우 부드럽게 진행되었고, 늦여름인 듯, 초가을인 듯 살짝 혼돈스러운 가운데 단풍이 날로 천지에 무르익어갔기에 "운치"로 포장된 "침울" 속 펼쳐질 가을을 잊고 지낼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메말랐던 여름부터 11월 말까지 대지의 갈증이 해소되지 못했던 만큼 올 가을엔 익숙한 비에 젖은 풍경이 실종되었고, 덕분에 어두운 긴 터널 속에 갇힌 듯한 황망함이 감돌지 않았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으랴!
경이롭다는 표현마저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고, 사랑스러웠던 가을이 겨울로 오버랩되면서도 온화하고, 따스한 빛은 여전했다.
독일 가을을 대표하는 명사는 '비 그리고 회색'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수십 년의 기억이 단 한 해 뜨겁던 여름 그리고 온화했던 가을로 퇴색되어 간다...
비 속에 갇힌 채 내 마음마저 비를 삼키던 시기에 마른 공기, 따뜻한 햇살 아래 사랑스럽게 펼쳐진 노오란 물결 도드라진 단풍을 수 개월동안 만끽하리라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이처럼 독일의 가을도 밝은 에너지를 한껏 발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뒤늦게 찾아와 며칠째 쉼 없이 내리는 비조차 반갑다. 저 목마른 자연들이 환호하니 나 또한 젖은 그 땅마저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아진다.
내 기억 속 풍경과 몹시 다른 환경 속에서 계절이 흐르노라니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며 지냈음이 분명하다. 여름을 찬미하고, 가을을 읊조리다 보니 어느새 12월 그 한 고지를 바라보고 있는 현실과 마주한다.
진정 연말과 마주하고 있는지 의심마저 품어진다.
마치 한 여름날의 꿈을 오래 꾸고 일어난 기분이다.
온통 찌푸린 하늘, 축축이 젖은 날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상을 웃도는 포근함.
지난 여름과 가을이 남겨놓은 반짝이는 기운.
그들과 함께 이기에 겨울이 찾아온 천지에도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담겨 있다.
이렇게 이 한 해가 저물어 가려나보다, 따스한 기억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