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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May 12. 2016

서행이 필요한 시기

멈춤의 의미

언젠가부터 내 삶에 자꾸 붉은 신호등이 켜진다.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한데 무엇인가가 내 걸음속을 늦춘, 내 의지와는 달리.

멈춤이 반복되는 날들 속 도치 않은 순간 오랫만에 스스로와 마주 서 본다.

절망을 딛고 내게 다가온 새 기회이기에 더욱이 놓칠 수 없다는 압박감에 숨 헐떡이며 앞만 보고 달렸고, 신호도 무시한 채 발걸음을 재촉해온 시간들이 빛 바랜 사진처럼 눈 앞에 그려진다.


하드웨어는 수동인데 급하다고 가스페달에 온 체중 다 싣는다고 가속이 되나?

편의성을 무시한다면 자기 멋대로(?!) 변속되는  오토매틱 차량보다 적절한 때와 시기를 감지해 스스로 기어를 전환하는 원리가 적용된 수동차 운전을 나는 선호한다. 변속, 가속, 제동 등 모든 기능을 내 의지로 직접 지휘해야 온전히 내가 그 차량의 주체가 된 으쓱함, 동시에 내 뇌도 100% 활성화되고 있는 뿌듯함. 또한, 때를 놓치면 가속이 제대로 안되고, 때 이른 변속에는 바로 부담스럽다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그 당연한 이치가 맘에 든다. 그렇기에 적시를 놓치지 않으려 주의도 기울이게 된다. 나의 경우, 오토매틱 차량 운전시 무의식 중 필요이상의 과속을 하는 횟수가 잦다. 변속을 안해도 페달을 밟는대로 가속이 되는 만큼 방심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소 번거롭지만 변속의 필요성으로 인해 속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이점도 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을 나는 최근 내 삶을 하드웨어 교체도 없이 완벽하게 자동화된 기계마냥 마구  다루어왔던 모양이다. 고장난 속도계같이 무뎌진 속도감만 내세우고, 제어기능을 잊은 위험천만한 운전자의 모습으로. 본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도 못한 채 성질만 부리고 있었다, 왜 가속이 안돼? 왜 제동이 안 걸려?

불리한 조건으로 새 입지 다지기에 마음만 앞 변속기, 제동기의 역활도 망각한 채 부작용만 초래하며 보낸 날들이 이제서야 돌아봐진다, 이제라도 돌아봐지니 다행이다.


멈추게 한 힘은 어데서 오는 걸까?

앞만 보며 허겁지겁 달려온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고 뒤돌아 보라는 의였을까?

무엇을 향해 질주해온 것인지, 발버둥치며 잡으려 했던 나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인생의 궁극적 목표와 방향을 되짚어 보라는 하늘의 신호였을까? 순항은 아닐지라도 궤도를 탈선한 것은 아닌지  나침반 확인도 않고 체가 넘실넘실 파도를 넘으며 직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정상궤도를 유지하고 있어" 방관했던 시간들을 이제 바로 잡아야한다.


인생에도 여러 방향, 여러 갈래 길이 있다.

때로는 막다른 골목길에 달하기도 한다. 직진을 고집하고 싶어도 막다른 골목길에서의 직진은 불가능하다. 돌아가는게 최선이다. 허나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또 다시 "직진"이 허락된다, 걸어온 길을 되밟고 나와야 새 길과 마주하게 될 지라도. 그러나 누구나 돌아설 용기를 가지진 않는다. 나만 해도 그렇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돌아서는 건 지는 거라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때문에 잘못 들어선 길도 되돌아 나오면 잠깐인 것을, 헤메이며 멀고 험한 길을 자초해 걸은 적도 많다. 설사 지면 어때? 잠시 창피한 들 어때? 지나고나면 잊혀지는 것 또한 인생의 묘미이며, 실책은 인정하는 순간 나에게 교훈인 것을.


노선만 잘못 잡은 게 아니었다. 마음만 앞서 모든 게 급했다. 언어적 핸디캡도 극복해야했고, 생전에 나와 상관있을 거라곤 예상도 못한 특수하고, 더욱이 내 관심사와 먼 거리감의 테마를 다뤄야하는 새 업무에 익숙해져야 했다. 게다가 조카뻘 팀 멤버들의 능력과 젊은 기에 눌려 내 존재감마저 흔들렸다. 경력 20년만에 맞은 최대 위기였다.

"서둘다 큰 코 다친다" , "급할 수록 돌아가라" 라는 신호 앞에서도 발 동동대 신호가 바뀌재촉했고, 때로는 도덕성을 도둑질 당한 사람마냥 신호무시에 익숙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니! 운전대를  잡으면 무의식 중 교통법 위반할까 극히  소심한 내게 이런 이면성이 있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이전 것과 판이하게 다른 세상으로 내던져졌다는 두려움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더 컸던 탓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하루라도 앞당겨 극복하지 않으면 생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더불어 내 실책이 행여 드러나면 어쩌나 불안감에 뒤돌아보기를 스스로 꺼려한 탓이다.


술에 배부를 리 없고, 아무리 가속해도 도착시기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서두르면 넘어지고, 체하는 법인 것을 왜 나를 돌아볼 생각조차 못하고 달려왔느냐고 나를 자책해본다. 

서둔다고 모든 꿈을 다 잡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도 확실한 노선을 고수한다면 더 나은 결과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엔 과속이 습관화되어버렸다.

왜?무엇이?어떻게?를 분석할 여유조차 허락치 않은 인생은 무엇을 이루고, 어디로 향할까... 뭔가 그릇된 기류를 눈치채고도 그 원인분석에 인색했던 댓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내 몫으로 돌아옴을 상기하자.


빨리 가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잖나.

이젠 서행하며 사는 삶, 때로는 후퇴와 우회로의 필요성도 인지하는 인생을 시작해보려한다.

다소 결과물이 미흡해도 그 과정과정에 심혈을 기울였기에 스스로에게 "수고했어!" 한 마디 따뜻한 위로와 독려를 아낌없이 건낼 용기를 허락하는, 부딛히는 매 순간순간이 시련과 고통일지라도 그 인생의 종착역은 "축복"이리라는 믿음을 품고 재기하려는 내 인생을 응원해주자! 


'느리게 가는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쉬어가는 인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남보다 뒤쳐져도 바르게 가는 여정 속 내가 추구하는 진정한 만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천천히 가보자, 미래는 달아나지 않는다.

나의 미래는 내가 다가서야 비로소 열리는 순간들로 채워지는 법이니까!




긴 인생은 충분히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인생은 충분히 길다.

A long life may not be good enough, but a good life is long enough.

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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