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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Mar 28. 2018

이 모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

편린 18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박준>


****

소설 퇴고를  끝냈다.   출판사에  보내기 전  메일을 적었다.   방금 쓴 소설에 대해  설명을  곁들였다.    소설을   메일과 함께 보내고 나서야  피로감이 엄습해왔다.  전신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황경신의  시중  한 구절에는  '내 삶은  너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대목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구절을  무척 좋아한다.   잔 생각이 많은 성격이라   인생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한 페이지 넘기듯  기억을  쪼개는  습관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내 삶을  새로운 소설이 '완성되기 전'과   '그 후'로 나눈다.     나는 체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인지  에너지를  소설 쓰는 데  다  소진하는 편이다.  소설 쓰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책 읽기도 힘들었고   영화도,  전시회도  그랬다.  덕분에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초연한 듯 보일 수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도통한 것 같다고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소설 쓰는 동안엔  다른 것들이  끼어드는 게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만남에도  예민해지고   입맛도 없어지고  잠도 안 온다.   그렇게 한동안 보내고 나면  주위에  사람이  남아있지 않은 느낌이 든다.   만남과  약속을 너무 절약한 탓이다.    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주 '짧은 순간'이   스치듯  나에게도  올 거라는  환상을  아직도  품고 있다.   그 순간을 위해  많은 것을  아껴둔다.  소설 쓰는 동안이  그런 순간이다.  만남도,  사랑도,  슬픔도,  걱정도 아껴둔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는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바람도  불어오고  불빛도 비치지만  내가 집중해야만 하는 곳은  어둠 속 어느 한 지점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곳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써야 한다.    소설을  다 써서  보낸  지금은   마치  터널 끝에  다다른 기분이다.    그 터널 끝엔   내가  애써 외면했던  햇살과  풀밭,  나무와  여유가 있다.   이곳까지  별 탈없이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안심한다.  더 다행인 것은  이 순간을 기다리며  나를  방해하지 않아준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행복한 순간이다.   내 친구는  더 이상 소설의 주인공들이 아닌  현실에 있는 '레알' 캐릭터가  될 것이다.  그런  희망이 없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이번 소설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동안  사용했던  문체를  바꿨고  주인공도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선택했다.   보다  현실적인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출판사에  소설을  보내고 나면  편집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보통은 몇 주 정도  시간이 생긴다.  '프리랜서'가  무슨 시간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걸렀던  독서모임에도  나가고 싶다.   한번 보자는 분들에게도  약속을 자꾸 미루며  '소설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라고  부탁했었다.   오늘까지  만남을 미루고 기다려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마치  다음 페이지를 넘기듯   약속 하나 없던  다이어리의  다음 장을 넘긴다.  빼곡히  약속과  만남으로  가득 채워가고 있는  4월이 다가온다.  내  삶은  오늘,  소설을 마친 날과  그다음으로  작게 나뉘었다.   그리고  글 쓰는  노동의 시간에서   놀아도 되는 쉬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4월에는  수많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   내 삶이  어떤 만남의 전과 후로  나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설렘도  함께  다가온다.    아주 특별한  순간,   기억할만한 계절,  그 시간이  다가왔으면  싶기도 하다.    4월을  위해  아껴두었던  만남들과  약속들을  이제는 즐길 때가 된 것이다.

4월에 만날 책들.  아직 몇권이 덜 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희망과 설렘으로  나를 기다린다.    4월에  만날  분들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국에 온 후 처음으로  만날  '내 사람들'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뜻해지는 날씨와  새로운 계절이  나를 기다리고   내 삶은  또 한 번  작은 챕터로  나뉘게 될 것이다.    2018년  3월 과  그 이후로,   '터널 속'에서와  '터널을  벗어난'으로,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에서  화합과  배움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전혀 모르던  새로운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앞으로  뭔가를  배우게 된다는 말과 같다.   내 안에  비었던 부분을 채우고  모나고 뾰족한 부분을  갈아내는 기회가 오기를,  그 기회를 통해   좀 더  나답고  나아지는  인간이  되어가고 싶은 바람을  가져본다.



한 페이지를  넘겨 새 챕터를 마주하기 전  책에는 보통  빈 페이지가 있다.   그곳에서  독자는  읽던 숨을 돌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비어있는 공간 같지만  사실은  글씨 적힌 곳 보다  더 큰 공간일지도  모른다.  제한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내용은  내 재량이 될 테니까 말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빈 공간에 내 그릇에 맞는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보기로 한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나만이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생각과  감각,  느낌과 행복,  사랑과  만족,  그리고  깨달음도.   

그동안  어질러졌던  책상 위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닫았다.   비누 거품을 내서  손을 깨끗이  씻는다.  모처럼  한가해진,  깨끗해진  손을  쑥 내밀어 본다.  나를 향해 다가올  미래를 향해서.  
그 빛깔이 찬란할 것인지,  밝을 것인지,  태양빛일 것인지  마주쳐 보면  알게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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