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19
사랑은 자신 이외에 다른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깨닫는 것이다.
- 아이리스 머독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처음 보고 알아봤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시작이 공기처럼 투명했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친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처럼 손이 많이 가는 사람에게 그는 거의 완벽한 남자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수백 가지나 된다. 그는 그만큼 나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다. 이성적인 매력도 있지만 인간적으로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열중해있고 만족하는 중이다.
그는 SNS에서 나와 이웃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는 말했다.
"이웃 같은걸 하게 되면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게 된단 말이야. 심지어 누가 좋아요 눌렀는지, 댓글로 뭐라 했는지도 신경 쓰여서 말이야."
그것은 귀여운 투정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질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뒤집어 보면 나는 너를 믿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그런 믿음을 받으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의에 충실한 의리파다. 거기에 나만의 세계를 존중해 준다는 그의 태도에 감명받았다.
그는 글을 쓰지 않는다. 대신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바다를 좋아한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을 잘 한다. 자전거도 잘 타고 달리기도 잘 한다. 운동은 걷는 것만 좋아하는 나와는 참 다르다. 책도 나와는 다른 것들을 읽는다. 철학서와 문학을 주로 읽는 나와는 달리 그는 시각적인 메시지가 많은 책을 읽는다. 어리숙한 나와는 달리 그는 쓸모 있는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나보다는 훨씬 어른스럽고 단단하다. 그런데도 잘난 척하는 때가 없다.
"대단해. 정말."
내가 글 쓴다는 것에 그는 감탄해준다. 부러움과 함께 존경의 눈빛을 보내준다. 나 자신이 참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는 투명하다. 처음과 지금이 항상 같았다. 숨겨둔 목적도 없고 나를 자신의 취향대로 바꾸려고 하지도 않는다. 허세도 없다. 내가 뭘 하면 뭐든 잘 했다, 맘대로 해라. 그런 말을 해준다. 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한다.
"내 눈에 너는 항상 예쁘지."
툭 던지는 말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그는 모른다.
언제부터 그를 알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주 최근에 만난 것도 같은데 돌이켜 보면 아주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다. 자주 보고 싶다고 말해준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좋다.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준다. 듣기 참 좋은 말이다. 요즘 말랐다며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밥 먹었냐고 챙겨준다. 그럴 때마다 감동이다. 그는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 오빠가 없는 나에게는 참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지만 그를 오빠라고 불러준다. 싫은 것, 좋은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그가 편안하다.
겉으로는 활달하고 당당하지만 내 눈에는 상처받기 쉬운 그의 마음이 보인다. 그는 그 마음의 상처를 나에게만 보여준다.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어 진다. 관심을 받으면 그는 잠시 동안 어리광을 피운다. 귀엽다. 그 귀여운 모습은 나만 볼 수 있다.
'누가 눈길을 보내도 당신은 내 사랑인 걸 잊지 마세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나는 그에게 이런 것을 보낸다. 한눈팔면 다 아는 수가 있다고도 보낸다. 그럼 그는 웃는다. 주위에 남자밖에 없어서 한 눈 팔 겨를이 없다는 말도 한다. 그런 그가 좋다. 그에게는 흔한 여자 사람 친구 한 명도 없다. 물론 내가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렇다니 그런 줄 알 뿐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런 확신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여자 사람 친구였다면 나는 우리의 사랑을 계속해도 될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거다. 주위에 이성친구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는 내 독점욕을 만족시켜주고 안심시켜준다. 그렇게 안심하면 나는 곧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수 있다. 그렇다고 그를 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글 쓰는 사람이므로 책을 읽고 글 쓰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 편하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그가 고맙다.
그는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글도 쉽고 논리적으로 쓰는데 말도 그렇게 한다. 어떤 말의 뜻을 주로 궁금해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도형이나 기하학적 의미를 더 궁금해한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얼마전 그와 전화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잠깐만, 나 빨래 좀 널고."
하고는 전화를 끊은 일이 있었다. 그는 빨래를 다 널고 청소도 대충한 정도가 지나서 다시 전화를 했다. 빨래 널고 설거지하고 내일 아침에 먹을 쌀도 안치느라 전화가 늦어졌다고 한다.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다. 이유를 굳이 찾을 수는 없었다. 개미처럼 움직이는 그 사람이 대단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는 그 태도가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부지런함이 존경스러웠다고 생각한다.
그는 단 것을 너무 좋아하고 기름기 많은 것도 자주 먹는다. 그런 점이 걱정되지만 아무 말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는다거나 아침을 거르지 말라는 말을 듣는 건 어쩐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예민해서 잘 깨는 점과 아무데서나 꾸벅꾸벅 조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피곤하냐고 물어보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부터 내 곁에 있었을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그가 내 곁에 없어도 나는 항상 그와 함께 걷는다. 글을 쓰고 밥을 먹을 때에도 그는 나와 함께다. 믿음직한 그가 나를 사랑해 주어서 감사한 날들이다. 그가 내 곁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주기를, 내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으로 남기를... 작은 기도가 쌓여 하루를 더 반짝이게 한다.
"사랑한다고 말해봐요."
내 말에 그가 대답한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