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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Nov 25. 2018

허무와 죽음의 경계

킬리만 자로의 눈,  헤밍웨이

이상한 일이다.  혼자 잠들 때면  불면증으로  뒤척이며  눈에는 안대를 하고  라벤더 아로마 향을 쐬어야 잠드는 내가  친구네 집에서 잠들 때면 업어가도 모르게 잔다고 한다.   말 그대로  머리가 침대에 닿자마자 잠들어  아무리 알람이 울려도 깨어나지 않는 '반 죽음'상태로  자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날 밤은 달랐다.   친구네 집에서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집에서 뒤척이던 것이나 별로 다르지 않게  누웠다가  또 앉아 있다가를 반복하다  결국  가방에 들어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한밤중,  조용한 방안에는  잠든 친구의 숨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잠드는 일은  가끔  '죽음'과 연관되어  표현된다.    누구에게나  닥쳐올  일이지만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므로  항상 공포스러운 경험,  미지의  두려움,  그러나  분명한 삶의 경계와 끝 선을 긋는 행위'  죽음'은  이 소설의  주제다.  개인적으로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객관적인 서술과 묘사에서 오는 강한 주관성에 있다.   남의 일인 것처럼 묘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내 일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 소설은  헤밍웨이의  모든 소설 중  가장 허무주의적이며 비관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흰 눈 덮인 서쪽 산 정상에서 얼어 죽은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질문의 답을 해줄 표범은 이미 죽었으니  대답해 줄 존재가 없다.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산 정상까지 도달했지만  얼어 죽어버린 표범이나   산 정상에 가고 싶었지만  미리 포기한 하이에나에게나  자신만의  이유가,  변명이 있겠지만   죽은 후  남겨진 것들에는  대답이 없다.   대답할 수 있는 자유도,  그 대답의 의미도  살아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헤밍웨이는  삶과 죽음의 중간 선상에 '고통'을  집어넣었다.   죽음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출구이면서,  삶에서 멀어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다 이루지 못한 사랑,  다 쓰지 못한 것들,  후회와  불안이 가득한  순간,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일까,  소설 마지막은 공허하고  쓸쓸하다.  


소설을 다 읽고 잠들었나 보다.  친구가 나를  깨워  창가로  데려갔다.   창문 밖에는  73년 만의 폭설이라는 첫눈이 쌓여  온통 설국으로 변해있었다.    하얀 눈길을  걸어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을  보러 갔다.  영화 첫 부분도  새하얀  눈으로  덮여  시작이다.   말 그대로  첫눈,  순결,  아름다움,  흰색의  청초한  향연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오후 1시쯤이다.   눈은 그쳤고  내려서 쌓이고 있을 때는  그토록 하얗게 보이던  눈이  가까이서 보니  회색  검고  더러운 색을 띠고 있다.  


흰 눈이  아름다운 것은   순백의  깨끗함 때문이고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은 살아있음으로 해서  뭔가를 창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흰 눈이  더러운 색으로 변하고  녹아 사라진다고 해도   흰 눈일 때의  가치를 잃지는 않는 것처럼   모든 삶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살아있고,  살아있었던  것들이었으므로   그  가치가  있다.   표범이  산 정상에서  무엇을  구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지금의 삶을  왜 살아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영화 새벽의 약속에서  로맹 가리의 어머니가  했던 대사, " 죽은 다음에 유명해 지면  아무 의미 없다" 는 절규가  기억나는 것은,   위대한 두 거장  로맹가리와  헤밍웨이가   죽음에 대해 하려던 말에  공통점이 있어서가 아닐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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