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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Dec 10. 2018

그녀의 일생

세상의 모든 딸들, 엘리자베스 마쉘 토마스

아직 여고생이었을 때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도서관  햇빛 비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세 권을  다 읽어버렸던  그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동네 서점에 들러  새 책을  샀다.   그때는 어렸고  아직 학생이었으므로  한꺼번에  세 권을 다 사지 못했다.   대신  그날은  1권을 샀고  다음 달 용돈을 받아 2권을,  그다음 달에는  3권을 샀다.  다음 책을 사기 위해 기다리던 순간은  짜릿한  기대감으로  남았다.   무척이나 애지중지 했던  그 책들은  내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중고 서점 한구석에서  이 책  1 권을 발견했을 때  내 감회가  무척 특별한 것이었음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1권을 샀는데  그날 밤에 다 읽어버렸다.   한파가  모든 것을 얼려버린다던 토요일 아침에  2권을 사러  중고 서점 강남점에,  다시 3권을 사기 위해 신림점에  들렀다.   그렇게 두 권을 가방에 담고  돌아오는 길에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2만여 년 전  후기 구석 시대,   순록과  매머드를  사냥하던  시절에  태어난 한 소녀가  여인이 되어  성장하는 이야기다.  '인류학자'인  저자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투명한 강물처럼  표현되어있다.    책 내용은 그대로였지만  읽는 내가 무척이나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내고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모든 여성이 그렇겠지만  여고생이었던  나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이 책을 읽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  앞으로 만날 사랑이  나에게 친절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여성으로서  부딪혀야 할  세상의 편견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주인공 아난의 삶은  여성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축소판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 아난은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강인한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 버렸을 때는   믿고 의지하던  기둥이 사라진 것처럼 슬프고 허전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는 이 소설은  그때와  많이 다르게  읽혔다.   시간이 흘러  내가 사랑을 배웠고   어느 정도  미래에 대한  윤곽을  잡게  되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삶이  두려움보다는 '공감'으로  더  다가왔다.   아직 어린 여동생을  책임감 있게 챙겨주는 것이나  사리 분별을  차분히  정리하는,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난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기도 하면서.   그녀의 남편 팀이  이제 보니 꽤 괜찮은 남성이었구나  알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도,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이  그런 상황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도  예전과는 다른 점이다.   내 눈이 자랐고  생각이 달라졌고   아무래도  사랑을  알게 된 것이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순록과  매머드,  곰과 늑대를 사냥하고  그 고기를  나눠 먹던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요즘 새로 나온 음식을  골라 먹는 시대에 산다.   그러나  여성이므로  겪어야 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 종류가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존속한다.   2만 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은  서로 사랑하다  미워하고   질투하며  복수한다.   그럼에도  깊은 마음속에서는  서로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감정의 강이  흐르고 있다.   인간은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고,  잘못된 행동에  모욕당했다고 느끼며  서로의 힘을  다투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커다란 인류사에  한 점 먼지도  되지 못할 존재라지만  이 책을  읽는 이 순간에는  나도  거대한 인류 역사의 강을 따라 흐르며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름 아닌  한 명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다.   왜  여주인공이  그토록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어야 했는지,  그럼에도  이야기가  이어져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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