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인 Dec 12. 2018

제 1장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

2화 (2)

"노을이가  맞았다니... 도대체  누가  그렇게 덩치 큰 애를 때렸다는 말이니?"

키가 184 센티라는 남자 고등학생이  누군가에 두들겨 맞아 울고 있는 모습이  언뜻 그려지지 않아서 내가 되물었다.   시연은  내 질문이  오히려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노을이 아버지  박 회장이겠지.  아... 사실은 나도  누구에게 맞은 것인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어.  그저  그 애가 울면서  제 방이 있는 이층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것을  몇 번 봤을 뿐이야.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반 팔 입은 아이의  팔과  등 쪽에  퍼런 멍이 들어있었어.  셔츠에는 피도 묻어있었고.   그때  집안 모든 사람들이  노을이가  다친 걸 못 본척 했어.   그러고  한참 후에   노을이  뛰어나온 방에서  박 회장이  화난 얼굴로  걸어 나오는 걸  봤어.  박회장 뒤에는 비서같이 보이는 남자가 한명,  휘어진 골프채를  들고  쩔쩔매면서 따라나왔고.  그 장면을 봤기 때문인지  여태까지  전혀 의심 없이  노을이를  때린 것이 박 회장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게도  박 회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노을이를 때린 게 아닐까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시연의  추측이 맞을 것이다.  대 기업 회장의  집 안에서,  그 회장이  집 안에 있을 때 애지중지하는 외아들에게  손을 댈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인 박 회장을  제외하고는.

"만약 박회장이  노을이를 때렸다고 해도,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아들을 왜  때렸을까?  그것도  골프채가 휘어질때까지  때렸다니...  무슨 이유가 있었던게 아닐까?   "  

"나도 그게 궁금해서  그  저택에서  일한 지  이십오 년 되었다는 요리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그분 말로는  노을이가  밥을  잘 안 먹어서 문제라는 거였어.  나날이 커지는 키가 싫다면서  몸이 더 자랄까 봐  극도로  걱정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박 회장 부부는  노을이에게  시시때때로  영양제며  보약을  해다  주는데  노을이는  그런 걸  안 먹고 버린다는 거야.    그걸  들켜서  혼이 많이 난 적이 있다고 하더라."

시연의  말에  나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키가 더 자라고  몸이 더  건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틀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양제만 버리는 게 아니라  밥도  안 먹으려고 했었대.   학교도  다니기 싫어했고   공부에도 흥미가 없었다고 해."

"공부 안 한다고  때린 걸까?   성적이 나빠서?   요즘에는  성적이  좋거나  나쁘거나  별로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고 재능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게  유행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내 대답에  시연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게  의아했어.   요즘에도  밥을  안 먹는다,  성적 나쁘다로  아이를 때리는 부모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   그것도  노을이처럼  다 큰 고등학생을 말이야.    어렵게 얻은  늦둥이 아들이라고  애지중지한다는 건 소문에 불과한 걸까  생각한 적도 있어.   그리고 박 회장을  보면  아들을  때릴 것 같이 생긴 사람은 전혀 아니었어.   굉장히  도덕적이고  신념 있는,  말하자면  '윤리적인 사나이' 같은 이미지였거든."

"윤리적인 사나이?"

나도 모르게 되묻자  시연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은 별명이야.   박 회장이  허튼짓은 한 번도 안 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라서.   그건 박 회장 당신도  직접 말한 사실이기도 해."

허튼짓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기업 회장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엄격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골프채로 두들겨 맞는  다 자란 아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그래서  결국엔  노을이를  유명 매니지먼트 회사에  데려다주고  아이돌로 성공시켜달라고  부탁했대.   다른 애들은  아무리 여러 번  오디션을 봐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회사에  노을이는  오디션도 없이  들어간 거야.    노을이 입장에서는  그런 식의 특혜를 받는 것도  싫었던 모양이야.   그날 저녁에는  노을이가  박 회장에게  심하게  대들었다고 들었어.   정원사 아저씨가 해준 말이니까   아마 소란이 집 밖에까지 들리도록 크게 다툰 모양이구나 짐작했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연은  부엌 조리대에서  한동안 서 있었는데   말을 마치고  내게  가져온 것은  햄과  계란,  치즈가 들어있는  샌드위치였다.   허니 머스터드를 함께  넣은 모양으로  샌드위치는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났다.   음식을 보자  배가 고파왔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나는  두 입째 베어 물고  샌드위치를 다시  접시 위에 내려놓아야만 다.    아주 짧은 시간  종훈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잊었다가  다시 그것이 기억난 탓이다.    다음 순간  가슴이 턱 막히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약 2초에서 3초 정도 되는 순간이었지만  종훈에 대한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슬펐다.   아니,  지금은  겨우 2초에서 3초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앞으로는  그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거라는,   결국에는  종훈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게 될 거라는 예감이  슬펐기 때문이다.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마주 앉아있던 시연은  당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얼른 휴지를 가져다  주었다.

"종훈 씨는  정말  바람둥이였는지도 몰라."

시연은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종훈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는 나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내가  그에게 있어서 단 한명  특별한 사랑이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결혼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사를 만나고 돌아온 후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CCTV 화면속에서  낯선 여자와  실랑히 하던 종훈은  내 눈에 낯설었다.   종훈은  그 낯선 여성과  어떤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나누던 세상은  내가 전혀 모르는 곳임이 틀림 없다.    그렇게 낯설어진  종훈은  더이상  나만의  특별히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와 사귀고 있는 동안에도  종훈은 다른 여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종훈이  아주 심하게 더러운 병균처럼 불결하게 여겨졌다.   그동안  나는 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게 어리숙하고  눈치 없는 여자였던 것인가.  종훈을  진심으로  믿고  또 믿기만 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종훈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라는  막무가내의 믿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그  믿음이 한 번씩 고개를 들때 마다  나는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보라야,  종훈 씨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

시연이 갑자기 내 생각을 끊었다.   순간 울컥하고 차오르던  분노를  차가운 얼음 칼로  조각내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하는 의심이  갑자기 솟구쳤다.

어젯밤에  시연이 밤새도록 울었던 것이  새삼 기억났다.   종훈이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나서  시연은  언젠가부터  내 눈을 피해 시선을  먼 곳에 두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시연이  종훈을 만난 것은  내 생일날 한 번뿐인데  시연은 종훈을 두 번 만났다고 했었다.

'설마.'

나는  눈에서 분노가 차올라  이글이글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시연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떤 말을 하기 위해  각오라도 한 표정이었다.

"너도  종훈 씨 좋아했니?   아님  종훈 씨랑  만나서  무슨 짓이라도 벌였던 거니?"

내 입에서는 곱지 않은 말이 튀어나갔다.   어쩌다 보니  내 삶의 전부처럼 사랑했던 종훈이라는 남자는  심지어 내 친구와 바람을 피웠을지도 모를  카사노바로 변해있었다.

"아니야,  그런 거.   종훈 씨가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나하고  종훈 씨가  그런 사이도 아니었고   내 생각에는  종훈 씨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었어.   너도 말했다시피  마지막 날까지  책을 썼고   환자를 봤고  너를 만났잖아.   그러니  네가  마음 상해할 만큼  바람둥이도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말은 그만둬.   지금은  종훈 씨에 대한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내 말에  시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슬프고 깊어서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촉촉하게 젖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침은  어느새  조금씩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그녀의 일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