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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Sep 27. 2019

눈물의 기억

열한 번째 이야기

사랑하는 당신에게.    

7일 22시간 36 분 전.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떠나야겠다는 말.  

우리가 분리될 수 있다는,  애초부터 두 개체였다는,  무엇보다 당신이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걸,  그 시간 이후에도  내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는  웃기만 했었지요.  우리는 내내 함께였으니까요.  십 년도 넘게 말이죠.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어요.  거대한 돌문이  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지요.  나는 빈 방에 멍하니 앉아  조각난 두개골이  흘리는 피를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수많은 것들을 깨달아야 했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두 사람이었고  두 개체의 유대감은  거짓이었다는 것까지도.  나는 침대 곁에 앉아  당신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오던 전화기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어요.  다시 울려주지 않을까,  타들어가듯  슬픈 눈물이  자꾸만  내내 흘러내려요.   당신,  나를 떠났습니다.    

****    

아직도 사랑하는 당신에게.    

34일  10시간  17분 전.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예전과 똑같을까요,  나는 시간에  낡아 부스러진 종이처럼  누렇게 바래어 가요.  처음으로  당신이 밉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화 한 번으로 끝나버린  당신과의  대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체취,  품을 수 없는 조언들이  빠져나간  내 삶이 슬펐으니까요. 나는 내내 슬퍼요,  당신.  나를 떠났습니다.        

****    

사랑하는 당신에게.    

67일 2시간 15분 전.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어요.  당신과 함께 였을 때는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던,  당신보다 건강하고  다정한 남자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좋다고 대답할 때는 내 심장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는 기분이었어요.  우리는 처음 가는 레스토랑에 앉아  따뜻한 스테이크를 먹었어요.  그 남자가 나를 향해 웃어줄 때마다  생각했지요.  당신도  그 여자에게  그렇게 웃어주고 있을까를.   그 여자도  당신을 향해  웃어주고 있겠구나를.

분노와 함께  복수심도 엉켜 들었지요.  그 남자와  다음 약속을 잡고  돌아오던 길에  문득  발길이 멈췄어요.      

예전 당신과 함께 걷던 작은 다리 위 그곳에서 오래 서 있었어요.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밤까지 서 있었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요.  오늘 밤에도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아요.  당신은  오늘도  그 여자와 함께일까요?   이 헛된 질문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중얼거렸어요.  피곤한 밤이네요.   당신,  돌아와 줄 수 있나요?          

****        

사랑했던 당신에게.    

160일  22시간  16분 전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오랜만이에요.  한동안  무척이나 바빴답니다.  여행도  다녀왔고  새로운 직업도  생긴 데다가  M은  나를  자신의 가족들에게 소개해 주었어요.  꼭꼭 숨기기만 했던,  주말마다 나를 혼자 두었던 당신과는 정말 다른 사람이에요.      

M은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해요.  나 만큼이나 음치지만  음악 듣기를 좋아해요.  일요일 아침이면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집안 청소를 하고  토요일 저녁에는  재즈카페에  함께 가요.  우리는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요.  어제는 목이 잠길 때까지 얘기하다  보니  밤 12시가 넘었더군요.  M이  나에게 물었어요.  

‘자고 갈래?’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이상하게도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이제는 나를 떠난 당신의,  돌아서서 걸어가던 마지막 뒷모습이.   상처 투성이로 남겨졌던  나를 버려두고 가버린 당신과의 시간들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이제 우리는 끝났구나.’  갑자기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당신,  나를 떠났나요?  우리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요?   핸드폰을 열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오래오래 들여다보았어요.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    

언젠가 사랑했던 당신에게.    

256일  14시간  22분 전,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침대 옆 구석에 떨어져 있던 노트를 지금 찾았어요.  짧은 반바지를 찾으려  침대 곁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젠 여름이에요.  여름휴가를 떠나기 위해  M이 예약해 둔 비행기를 타려면 시간이 별로 없어요.   M은 정말 신기한 남자예요.  어디를 가도  꼭 나를 데리고 다니는 데다가  주위에는 온통 남자들 뿐이에요.  당신에게는  많고도 많았던 여자 사람 친구도 한 명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과 M을 비교하는 건 싫지만  예전의 나는 항상 당신의 여사친들을 신경 써야 했어요.  온전히 나만의 당신을 원했지만  단 한순간도  그렇지 못했어요. 나는 지쳤고  비참했었지요.    

M과 함께 있을 때는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져요.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 시선도 무섭게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요.  그런 기분을 아마 당신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오늘 처음으로  당신의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의 나처럼 불안 하고  슬픈 밤을 보내고 있겠지요.  아닐까요?  어쩌면 당신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을지도.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지만요.

그러고 보니  당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나요?  더운 여름 잘 보내길.  당신이 나를 버리고  찾아간 그 망할 여자와 함께.    



****    

나를 떠나 줘서 고마운 당신에게.        

425일 12시간 11분 전,

당신이 나를 떠났습니다.    

어제  우연히  당신과 마주쳤어요.  우리는 작은 카페에 마주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당신이 나의 M에 대해 묻지 않았듯  나도 당신의 여자에 대해 묻지 않았지요.    

다시 만난 당신은...... 지루했어요.    

죽을 만큼 아팠고 힘들었던 시간을  겪어낼 만큼  중요하지도,  내 인생을 걸만큼 가능성도 없는.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본인 이야기만 하느라 대화도 통하지 않는,  불안함에  눈동자를 굴리고  자꾸만 커피만 마시고 있는 남자를.  왜 나는 놓지 못했을까요?    

고마웠어요,  당신.  내 인생에서  멋지게 퇴장해 준 것에.   앙코르는  더 이상 없다는 게,  인생의  축복이라는 사실에도.  삶은  정말 살만 한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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