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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Jan 20. 2018

돈가스 이야기

편린 07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는  2017년 연말에  혼자서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눈 수술을 한데다가   한국에는  별로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   그리고  연말에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바쁘다는 것이  내 생각의  근거였다.   

수술 후  12월 23일부터는  외출이  허락되었지만  내  다이어리  스케줄 란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20일 경부터  친구들과  지인들의  연락이  쇄도하기 시작하더니   23일부터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이  정해졌다.   수술 전  얼굴을 내밀었던  모임에서부터  친구들,  지인들과의  간단한  만남과   동생 가족의  초대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매우 아침형  인간이라   저녁 6시 이후에는  모든  생체 활동이  급격히  떨어지는 특성이 있다.   내가  가장  활동적인 때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이나    아직은 낯설지만  배려해 주는  지인들 덕분에   모든 약속이  점심시간에  정해졌다.    점심을  먼저 먹고   다른 스케줄을  잡아주셔서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3일에  만난 친구가  돈가스를  먹자고  했을 때는  내심 반가웠다.   미국에는  '돈가스'라는 메뉴가 없기 때문에  돈가스를  먹으려면   아주 먼 한국이나  일본 식당에  가야만 했고  정말 먹고 싶어지면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24일에  만난 지인과  파스타를 먹었고   25일에는  모임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문제는  26일에도,  27일에도  점심 메뉴가  돈가스였다.   

특별히  돈가스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 데다가   같은  음식을  두 끼 이상 연이어 먹지 않는 나로서는  돈가스 먹기가  고역이 되었다.  28일이  되자  제발  '돈가스가  아니라면 뭐든지'  먹겠다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 메뉴는 '왕 돈가스'였다.   모임에서  정해진 메뉴였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다른 걸 먹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여태까지 먹었던  소스와  다른 소스를  뿌려 먹기로  하며  하루를  넘겼다.    29일에는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났으므로  절대  돈가스는 먹지 않겠지 했는데   친구가  '티브이에 나온  맛 집'이라며   데려간  곳이  하필  돈가스 전문점이었다.    그곳에서는  '치즈 돈가스'를  먹는  것으로  하루를  넘겼다.   30일에  나를  불러내신 것은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이셨다.   하늘같은  선배님이시라  감히  싫다는 말을  못하고  사주시는 대로  돈가스를  또 먹었다.   

31일에는  동생을  만났으므로   아침부터  다짐을 했다.   
'오늘을  절대로  돈가스를 먹지 않으리라.'

그런데  사랑스러운  조카가   아침부터 '돈가스'  노래를  불렀다는 말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돈가스를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베 돈가스'를  시켰는데  차라리  그냥  돈가스를 먹을걸  후회하며   식당에서 나왔다.

1월 1일에는   친구와  만났다.   대학로에서  만난  친구가  데리고  간 곳은  또  돈가스  전문점이었다.   이젠   돈가스 아닌 것을 먹는 것을  포기해서인지   우리는 '돈가스 정식'을  시키고   마주 앉아  내내 떠들었다.   이 정도  되니   '돈가스는  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도 같았다.   

오늘은  1월 2일이다.   만나는  사람이  가끔 부리는 투정도  받아주시는 언니라   점심 메뉴를  먼저 정해보기로 했다.
"뭐 먹을래?"
하시기에
"돈가스 말고  뭐든 좋다."
고  대답했는데   아,   데리고 가신 곳이  또  돈가스 전문점이다.
"네가  돈가스를 절대 안 먹겠다고 해서   돈가스가 엄청 먹고 싶은가 했지.   지나친  부정은  엄청난  긍정이거든."
"아,  언니.   우리 다른 거 먹으면  안될까요?"
내 말에도  언니는  웃기만  하셨다.

올해  '돈가스'가  내 운명인가?   이쯤 되면  돈가스에  적응해 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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