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인 Jan 30. 2018

인연

편린 10

인연


김지헌


눈 비벼 크게 떠보아도

보이지 않는

질긴 끈 하나

너는 나의

태초의 바람

산맥을 가르고

바다를 가로질러 내게로 왔구나



****

사람이 다친 사고를 보게 된 그날은  무척 추웠다. 지난밤에 눈도 왔다. 모든 게 꽁꽁 얼어 길이 미끄러웠다. 오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소설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냥 책이나 읽자 싶어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근처  차가운 길바닥에 할머니 한 분께서 쓰러져 계셨다. 피가 할머니 주위에 낭자했다. 자전거로 할머니를 치인 듯한 여성분이 할머니 곁에서 어쩔 줄 모르고 계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를 살펴봤다. 호흡도  있었고 맥박은 약간 불규칙했다. 무엇보다 얼굴에서 출혈이 심하다.


"빨리 119에 전화하세요!"

자전거 주인에게 말하고  급한 대로 지혈을 했다. 할머니는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눈을 뜨시고  나를 알아보셨고   말씀도 하셨다.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나  앉으셨다.   내 손을 잡으시더니

"천사 아가씨,  고맙습니다."

하신다.   곁에 있던  분들도

"할머니,  오늘  이분 안 계셨으면  어쩔 뻔하셨어요?"

"할머니랑 전생에 인연이 있는 분인가 봐요."

하셨다.   그런데  정작  나는 멀리서  구급차 오는 것이  보이자  할머니께  인사만 하고  얼른  집 쪽으로  달려와 버렸다.    할머니 곁을 더 지켜야 할까  잠시 갈등은 했지만  타고난  수줍음이  얼굴을  든 모양이었다.     한참 걷다 돌아보니  구급차가  할머니 곁에 멈추는 것이 보였다.   먼발치에서 나마 구급차에 실려가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니  새삼 예전에 봤던 환자들이 떠올랐다.


맨해튼 시내를 걷던  한 남자가  소매치기를 당했다. 남자가 소매치기를  쫓아갔다. 소매치기는  이리저리 쫓기다  길가에 서있던  여자를  밀쳤다. 여자는  순식간에  차도로 밀려 나가버렸다. 결국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소매치기를 붙잡으려던 남자도, 그리고 소매치기도  몸싸움 끝에  다쳤다. 이렇게 세  사람은 병원에  실려 왔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세 사람이다.  병원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내  환자는  여자였다.  그녀는  머리를 다쳐  위중한 상태였다.  의식도 없다.  상태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중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수술을  마치고  그럭저럭 회복 중이라고 한다.  흔한 일이 아니어서 지역 신문에서도 취재를  나올 정도였다.  이 기막힌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 오죽하면  옛사람들이  '전생'을 빗대어 이런 상황들을 이해해 보려고  했을까  싶다.  직원들과  커피 한잔을  놓고  앉아  한참 동안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옛날 옛적  금슬 좋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전쟁에서 사망한 미망인이 새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새 남편이 알고 보니  전 남편을  죽인 사람이었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모인 인종 전시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전 세계에서  온 이들이었다.   내 말에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고  보니 세계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첫눈에 빠진  사랑이  사실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었다거나    생각 없이 저지른  작은 실수로  비틀려 버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교에서 말하는 '악연'이나  '전생'을  이야기했었다.  이런저런  '질기고  끔찍한' 악연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악연도 있지만  좋은 인연도 많다. 내가 만나려고 해서 반드시 만나는 게  아니고,  운명이 나에게 데려다주었기 때문에  만나지는 이들이  인연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만나지 않겠다고 해도  만나지는 게 인연이다.


'인연'이  있다면  꼭 만나게 된다고들 한다. 문제는 꼭 만나는 그 사람이  '좋은 인연'인지,  아니면  '나쁜 인연'인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이 새삼  큰일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한두 번 만나서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수십 번을 만나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비단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여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서도  낯선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이 나에게 좋은 인연이었을까 나에게 물어본다.  다시 그 물음은 반성이 되어 내게 되돌아온다.  나는 그들에게 좋은 인연이었던가?라고 말이다.  


운명이란  거대한  힘이 만들어 낸  무대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나는 그 무대 위의  피노키오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인생이란 게 무대와 같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얽히고설킨 인연의 줄 위에서 정해진  운명을  밟고 가는 것뿐일 거다. 언제부턴가 내가 운명을 개척한다기보다는 운명이 나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덕분에 내 삶에도, 내 만남에도 다소 수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지라도, 지금 내가 선한 의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면,  적어도 악연이 쌓이지는 않겠지. 미약한 소원이지만, 그것밖에 바랄 수 없는 소심한 자신을 자꾸 되돌아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