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떨기 Sep 25. 2019

Á Paris

애인이 오기 전에 본 은하수



파리에서 생활한 지 39일째. 달라진 건 없지만 통장 잔고는 부지런히 줄어들고 있다. 이틀 전부터 팔목 위에 붉은 반점이 두드러기처럼 나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언니한테 슬쩍 보여줬더니 이제 막 물갈이를 시작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내 몸이 이 도시의 시간과 분위기에 점차 적응하고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한 걸까. 여기서 보내는 하루를 기록하는 일에 압박을 느끼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내자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마음에 무뎌지는 일이 가장 두렵다. 


파리는 결코 큰 도시가 아니지만 매일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야경이 근사한 곳임에도 낮에 보는 에펠탑이 좋은 이유 역시 그날의 날씨, 구름의 모양, 바람의 정도에 따라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에펠탑 중에 같은 모습은 단 하나도 없다. 이곳이 ‘사랑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도 사랑 역시 매번 다른 손길과 형태로 찾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동안 파리에서의 일상과 애인과의 관계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다. 그 모든 게 더 나은 내 모습을 위한 것이니 언제나 그렇듯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어젯밤 애인은 내게 “이제 당신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리워.”라고 말했다. 두 마음의 거리와 쓸쓸함을 아는 사람이어서 나는 자꾸만 그를 놓으려 하지 않고 욕심낸다. 그가 쓴 편지 중에 내가 밑줄을 긋고 자주 들여다보는 문장이 있다. 


“사랑해라는 말을 다양한 표현을 이용해서 전달하는 느낌이야!”                                                  



파리에서 보낸 2018년 9월



대학 졸업 이후 파리에 가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2월부터 봄이 오기 직전까지는 귀금속 가게, 초봄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여자 보세 옷 가게, 한여름부터 가을이 오기 전에는 맛집으로 유명한 참치 가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는 일도 달라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모두가 파리에 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당시에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라며 무슨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목처럼 근사한 이유를 갖다 대었지만 아직 나조차 파리에 와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 늘 그럴싸한 단어들을 조합해 다정한 척 굴지만 이 모든 게 다 내 선택에 불과하다는 것. 사실 파리에서도 외로운 건 내가 아니었다. 혼자 이곳에 있다는 이유로 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애정을 내어주었고 매일같이 나의 하루와 건강 상태 그리고 마음에 대해 묻는 애인과 친구 가족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보단 타인을 외롭게 하는 일에 능숙하고 익숙하기만 하다.                                

                     

아침마다 과일 4개를 깎는 내 모습에 감탄한다

                

                                                                      

9월과 10월의 차이라면 지난달에는 납작 복숭아를 줄곧 먹었다는 것이고 요즘은 애플망고에 푹 빠졌다. 별다른 생활용품은 사지 않지만 빵과 과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아침마다 요구르트와 과일을 챙겨 먹는 내 모습이 얼마나 웃기는지.                                                    



한동안 그리울 것 같은 내 방



사진 속 책상에 앉아 매일 밤 엽서를 쓰고 있다. 그가 그리운 날이 대부분이었으나 서로의 마음을 할퀸 날에도 여과 없이 글을 썼다. 문득 그와 나의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해체해야 하는 시나 소설은 회피하고 오직 사랑의 다정한 속성에 기댄 것 같아 자주 부끄러웠지만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애인에게 100장의 엽서를 한꺼번에 받는 일이 두려운지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모든 엽서를 엮어서 책처럼 두고 읽겠다고 했다. 최근 든 생각은 그가 내게 곁을 내어준다면 나는 동화를 쓰지 않을까, 라는 것과 나보단 그가 글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                      


                              

애인에게 쓴 엽서



내가 조금 더 예민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애매한 다정함은 나와 당신 우리를 모두 갉아먹는다. 그동안 정을 둔 여행지가 꽤 많음에도 하나도 정돈하지 못했다. 책장에는 온갖 여행지의 도록, 입장권, 사진들이 나뒹군다. 당시 내 마음을 함부로 추측하고 꾸미는 게 내키지 않은 탓에 글로 남길 수 없었다. 파리에서 보내는 일상도 그렇게 희미해지면 어쩌지. 


오늘은 머리를 감지 않아야겠다. 에펠탑 같은 관광 명소나 미술관 작품 앞에 있는 내 모습보다는 아침 시장, 퇴근길 지하철, 이불속에서 만나는 내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파리에 왜 다시 가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주저 없이 “지하철!”이라고 할 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