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오후 네 시가 지나면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다. 일자로 길게 이어진 국도의 차선도 원뿔 모양의 활화산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머무는 집 근처라도 한 바퀴 돌고 올까 싶었지만, 별이 잘 보이는 동네일수록 가로등을 찾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외출을 포기하고 캐리어에서 저녁 찬거리를 찾았다. 누군가 트렁크에서 꺼낸 와인을 식탁 위에 올려놓자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단하게 허기를 달래고 나면 너나 할 거 없이 훈민정음을 외쳤다. 긴긴밤, 끊임없이 와인 잔을 가득 채웠던 게임의 방법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한 사람이 한글 자음을 두 개 내지 세 개 외치면 남은 사람들이 연상되는 단어를 재빨리 외치는 것. 자신의 마음을 말보단 글로 끼적이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기에 접전이 예상됐다. 그런데 예상외로 시 쓰는 오빠가 영 젬병이었다. 아직 게임이 익숙지 않은 건가 싶었는데 여행 마지막 날이 되어서도 언제나 꼴찌는 시 쓰는 오빠였다.
자신이 쓴 문장 앞에 오래 머물다 번번이 넘어졌을 사람이 이 게임을 못 한다는 게 이상했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 그를 보았다. 매일 반복되는 게임이 지겨운 걸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느낀 바람을 그리워하는 걸까. 그렇다면 내일 밤에는 무얼 해야 하나.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는 새로운 낱말을 찾는 게 아닌 이미 다른 사람이 외친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정성스럽게. 그날 밤, 시인은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와 그 바깥의 울음소리까지 헤아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는 게임을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의 눈동자를 흔들고 싶었다. 내 입속에서 흘러나온 단어의 부숭부숭하게 마른 껍질을 깨문 다음 진득한 과육까지 남김없이 삼켜주길 바랐다. 그때 누군가 미음과 시옷을 외쳤고 내가 그 말을 떠올리기까지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모순, 누군가 나를 정의하라고 하면 반드시 꺼내야만 하는 단어. 그날 밤, 모순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번번이 이 좁은 방안을 달아나는 걸 상상했지만 다시 자신을 스스로 낚아챘을 만큼 내게 이곳은 더없이 안락했다. 그래서일까, 매년 12월 31일이면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을 새해 의식처럼 다시 읽는다. 지난 일 년 동안 어긋나야만 했던 마음을 한 번 더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소설 속 안진진과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의 조제가 스물다섯이란 이유만으로 그 시절의 나를 유독 아꼈다. 달랑 캐리어 하나만 들고 파리에 가서 나의 모든 모순과 거짓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모순』의 김장우 같은 남자를,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풀꽃 같은 남자를 사랑했다. 내게 끝끝내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그립다고 말하는 이의 몸을 칭칭 감고 나 혼자 아껴 읽고 싶었다. 어떤 밤이면 그의 거짓말을 삼킨 채 영영 체한 듯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고, 손끝과 발끝이 새하얗게 질린 채 몸속에 검은 피가 들끓어도 선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또다시 모순을 베고 누운 밤. 낯선 도시에서 그 단어의 부피를 가늠해본다. 이와 반대되는 말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비슷한 단어로 배반이 나오는 걸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내게 그 말은 언제나 지독한 사랑이었는데 그런 뜻은 어디에도 없었다.
훈민정음 게임은 모두가 다른 단어를 안고 살아간다는 걸 일깨워줬다. 이때 사전적 의미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문장 하나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부딪히고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때때로 깨진 말소리의 파편을 주워 담을 줄도 알아야 했다. 언젠가 시를 쓰는 오빠에게 양귀자의 『모순』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책이 막 출간되었을 때 읽긴 했는데 이제는 그 세세한 내용까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모순을 외치자 시계방향으로 명심, 망상, 명상, 명소, 미소, 무심까지 차례대로 어휘들이 튀어나왔다. 다시 시인의 차례였고 그는 여지없이 다른 사람의 미음과 시옷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기분일까, 사라진 단어 안에 갇힌 채 자꾸만 서성인다는 건. 지나간 시간을 소화하는 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로의 입에 말 그림자를 넣어주던 밤. 무수히 많은 마음이 허공에 떠다녔음에도 나는 늘 같은 장면 앞에 서서 밭은기침을 했다. 그날도 속절없이 한 남자가 사무치게 그리웠으나 보고 싶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