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

by 일기떨기







 수더분하게 생긴 빵을 만나면 마구 말을 걸고 싶다. 새벽에 레이캬비크 시내를 한 바퀴 뛰고 돌아온 지연 언니가 근처에 괜찮은 빵집 하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이랑 시나몬 롤을 파는 곳인데 이제 막 굽기 시작한 애플 시나몬 냄새가 거리에 진동한다고, 아직 바깥은 추우니까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 몇몇이 다녀오자고 했다. 사실 이번만큼은 게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빵순이에게 이건 이겨도 지는 싸움, 지면 더 고마운 일일 테니까.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뒤에도 헬싱키 'Ravintola KAMOME'를 가지 않은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촬영지였던 그곳에 가면 시나몬 롤과 말차 라테를 주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시인 오빠가 핀란드에 올 때마다 꼭 들리는 구제 숍이 있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헬싱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 빵집을 920m 앞에 두고 가지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그날의 아쉬움을 달랠 기회였다.


 태풍을 뚫고 도착한 'Braud&Co'는 화려한 그라피티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모름지기 빵집이라면 따스한 우드 톤의 인테리어와 우유 식빵의 겉면처럼 노르스름한 조명이 포인트 아니었나. 호두까기 인형에 나올 법한 겨울 나라에서 디트로이트 뒷골목 같은 풍경이라니 별다른 기대 없이 빵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훅 끼치는 빵 냄새를 맡기도 전에 진녹색 야구 모자를 대충 눌러쓴 남자와 맞닥뜨렸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대뜸 잘 잤냐고 물어보는 사람. 입 주변에 담갈색 수염이 복슬복슬 나 있어 표정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자신의 입 모양을 유심히 살피자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저 남자 꼭 빵처럼 생겼다. 달팽이 모양의 페이스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살짝 들어 종이봉투에 넣는 모습이 커스터드 크림으로 꽉 찬 슈크림 빵 같아. 괜히 그의 팔꿈치를 내 쪽으로 끌어와 말을 걸고 싶었다.


 제빵 선생님은 빵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기다림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빵을 반죽하고 성형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발효 시간이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빵이 발효기 안에 들어간 시간을 확인하는 건 물론, 중간에 잊지 않고 반죽의 형태를 살펴야 했다. 이때, 아무리 꼼꼼하게 만들었어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모든 빵은 오븐 안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알 수 없었고 언제나 건포도만 한 희망만을 툭툭 던지곤 했다. 문득, 빵만 잘 배워도 요령 피우지 않고 정직하게 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중간 평가 날에는 선생님 도움 없이 비상 식빵을 만들었다. 아침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조 편성을 다시 해야 했다.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섞어보지 않은 이와 밀가루 몇 그램, 달걀 몇 개, 재료는 모두 어떻게 분류할지, 누가 무엇을 할지 역할을 나눠 진행하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내 방식대로 만들었더니 평소보다 결과물이 좋았다. 선생님은 실제 시험장에 가서도 절대 다른 사람의 속도에 동요해선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6개월 동안, 이 수업에서 배운 건 바로 그 정직한 기다림이었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내 마음의 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전부 다 잃어버릴 게 분명했다.


 섬나라의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얼레벌레 취업을 하고,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제빵을 배웠다.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 개씩 제빵 실기 시험에서 나오는 품목을 만들었다. 점심시간은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였지만 다들 자신의 빵을 살피느라 대충 끼니를 때우곤 했다. 빵은 늘 내 예상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부풀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을 마음껏 내어주는 빵을 대할 적마다 고요가 찾아와 오랫동안 머물곤 했다. 내가 만든 빵이 옆사람 것보다 눈에 띄게 크거나 별난 모양일 때면 트레이를 통째로 들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제빵 선생님 몰래 이스트 양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처음에는 5g씩 나중에는 10g씩 그렇게 조금씩 빵의 마음이 부풀지 않도록 옥죄었다. 선생님은 반죽도, 성형도, 발효 시간까지 잘했는데 빵 크기가 이렇게 작을 리 없다며 혹시 계량을 잘못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밀가루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고, 설탕은 맛을 좌우할 뿐이니 이스트의 양을 제대로 확인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 여겼던 마음이 알고 보니 빤히 보이는 꼼수에 불과했다. 마침내 계피 맛 설탕이 담뿍 들어간 시나몬 롤을 만들게 되었을 때, 그날도 어김없이 애인에게 빵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내가 아침에 만든 빵이야, 실제로 보면 더 크고 귀여워. 오늘은 설탕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더 맛있을 거야. 하루는 그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말마다 제빵 수업을 했던 실용전문학교 강사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집에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텅 빈 실습실 바닥에 눌어붙은 달걀 껍데기를 주웠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여기 있는 오븐을 다 켜놓고 도망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굽지 않고, 애쓰지 않고 뜨겁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요일 아침마다 빵을 만들면서,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또 한 번 가위바위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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