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칙

by 일기떨기







 식구들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레이캬비크에서 각자 기념품 숍이나 베이커리, 작은 서점에 다녀오긴 했지만,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세이디스피외르뒤르가 넓지 않았고, 호수는 전날 밤에 꽝꽝 얼어붙었기에 빠질 염려가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머무는 노란색 이층집이 마을 어디서든 잘 보였다. 아침을 간단하게 챙겨 먹고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무지개 길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하늘색 교회부터 초록 지붕 집, 얼룩말 무늬로 된 기념품 숍, 바바파파가 그려진 집까지. 눈 내리는 풍경을 따라 다양한 집의 모습을 담았다.


 그날 밤에는 면세점에서 산 모엣 샹동 호제와 하얀 크리스털 장식으로 된 샴페인을 뜯었다. 두열과 웅희는 이 동네 작은 수영장에서 아침 수영을 했다고 했다. 동갑내기 두 남자가 가장 먼저 집을 나섰을 때부터 의아했는데, 꼬마 알전구로 장식된 수영장이라니. 그 따뜻한 물속에 발을 담가보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 아늑해 보였다. 지연과 제인은 프랑스인 남자가 운영하는 카페 <바빌론>에서 만난 복슬복슬한 강아지 티나 사진을 보여줬고, 정화는 일 층 부엌에 있는 오븐으로 파운드 케이크를 구웠다. 모두가 각자 보낸 하루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저 걸었다고, 가장 멀리 보이는 집까지 걸어갔다가 겨우 여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의 여행이 반쯤 지나왔을까. 서로 조금씩 긴장을 내려놓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담배를 태우러 갔던 이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


"빨리 나와 봐. 밖에 오로라가 있어. 녹색으로 된 띠가 선명해!"


 나는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간단한 목욕용품을 챙겨 화장실에 갔다. 뜨거운 물이 내 목덜미부터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지는 순간 온몸이 따가웠다. 샤워기를 들고 부르튼 손등을 시작으로 가슴골과 겨드랑이 그리고 허벅지 사이까지 천천히 쏘아대기 시작했다. 살점이 얇은 부위일수록 더 빨리 붉어졌다. 나는 오로라가 사라질 때까지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날 밤 오로라는 꼭 벌칙 같아서, 어디로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최근 자주 외로웠다.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어색하고 답답했다. 혼자 남겨지는 것도 싫었지만 타인과 시간을 나누는 일 역시 버겁게 느껴졌다. 말을 할 때 반점보단 온점을 더 분명하게 찍는 친구로부터 너는 누구에게나 살갑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벽이 있어, 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감정은 곧잘 표현하지만, 사소한 불만이나 서운한 점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게서 뒤돌아선 몇몇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선물 가게에서 포장지와 리본을 고르는 일처럼 순간의 고민과 얄팍한 관심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마음을 전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건 내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고르는 게 아닌, 나를 부수고 산산조각 내어 땅굴을 파고 들어가야 했다. 결국 내 밑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단어와 과격한 표현을 썼다면 그건 공격이 아닌 자폭에 가깝다.


 나는 스스로 추해지는 게 싫어서 남을 미워하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내게 화를 내면 반격하기보단 무시하기를 택했다. 사실 화가 났다.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단어만 골라내, 폐부를 찌르는 문장을 완성했다는 게 서러웠다. 당장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가 말하고 싶었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고, 나라고 너를 알고 지내는 모든 시간이 마냥 좋기만 했던 줄 아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난 누구에게도 끝까지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가장 추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식구들은 여행지를 이동할 때마다 지금 느끼는 그리움에 대해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너무 좋다, 엄마랑 꼭 와야지.", "이 온천은 애인이랑 와야겠어.", "난 여름에 식구들이랑 다시 올 거야."라는 말들. 사소한 소망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거대한 눈 속에 갇힌 듯 답답해졌다. 그리워할 대상이 많아질수록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는 건 잔인했다. 무엇보다 모든 그리움이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라는 게 서글펐다. 이런 마음으로 오로라를 마주하게 된다면 꾹꾹 억누르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았다.


 내가 어딘가로 떠날 때마다 자신들과 다르다고 여기는 엄마와 아빠, 아이슬란드에 가면 헤어질 거라고 말했던 애인, 나와 다르게 유약한 마음을 가진 두 동생, 이렇게 하얀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는 미카까지. 그리움은 언제나 벌칙처럼 예고 없이 다가왔다. 서로를 그리워만 하다 이제는 보거나 만질 수 없이 그리기만 하는 사이가 되면 어쩌지. 그날 밤, 두열에게 부탁해 어두운 하늘에 선명하게 찍힌 오로라 사진을 받았다. 그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가족과 애인에게 보낸 다음, 카카오톡 채팅방을 나갔다. 그리고 사진첩에 남은 오로라 사진을 전부 지웠다. 나는 오로라를 보지 못했고, 그날 밤만큼은 아무도 그립지 않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