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무인도

by 일기떨기







소설가 조영아 선생님께 언제고 연애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정직한 문장을 쓰는 작가였다. 사실 명확한 대답을 바라고 물었다기보단 하소연에 가까웠다.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대신 답해줄 수 없는 물음이기도 했다. 그때 교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내 얘기를 듣던 소설가가 천천히 말했다. “소진아, 그건 모든 소설가의 꿈이야. 나 역시 그렇고.” 그 말이 내게 너무 큰 위로여서 어떤 그리움이나 슬픔도 하나의 장면처럼 읽혔다. 그 말을 무인도처럼 안고 살았다. 마음이 빈곤한 날이면 어딘가에서 내 스승이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단 생각으로 버텼다. 제인을 만나기 전까지.


 초등학교 4학년 수학여행 때,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4,000원밖에 없었다. 2박 3일 동안 어른들의 보호 속에 숙식마저 다 제공되는 견학에 뭔 돈이 필요한가 싶지만, 돈을 쓸 수 있는데 안 쓰는 것과 돈이 없어서 못 쓰는 건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 수학여행지 1순위였던 경주에는 평소 엄마, 아빠한테 잘하지도 못하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같은 문구가 새겨진 나무판부터 효자손 그 지역 먹거리까지. 돈이야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쓸 곳이야 넘쳐났다. 그때 나는 전 재산 4,000원을 한 번에 배팅했다. 다름 아닌 청소년 수련원 1층 자판기 앞에서. 그때 같이 장기자랑을 준비했던 친구들한테 500원짜리 음료수를 사줬다. 마치 내 주머니가 충분한 것처럼. 이 정도는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나는 돈이 참 우습고 별다른 흥미도 없는데, 가끔 돈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때도 있다. 어릴 때 생긴 경제 관념 탓인지 평소에는 허튼 돈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사거나 밥을 먹을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결제를 한다. 그건 내 마음에 빚질 일이 없는 일이니까. 그건 나를 더 미덥게 해줄 일이니까. 아이슬란드 여행은 면세점에서 와인을 고르는 일과 함께 시작됐다. 언니 오빠들이 카트까지 끌어와 와인을 담기 시작했다. 나는 와인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여행 경비가 넉넉하지 않았다. 내가 총무를 맡은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돈을 아껴야 하는 건 누가 봐도 유일한 취업준비생인 나였으니까. 시인 오빠가 와인을 30만 원 넘게 살 동안에도 나는 카트에 아무것도 담지 못했다. 빈 카트를 보고 있으면 그게 꼭 내 통장 잔고처럼 느껴졌고 술을 고르는 일이 즐겁지가 않았다. 한참을 면세점을 돌다 고른 것은 밸런타인데이 기념 핑크색 상자에 담긴 모엣샹동 호제와 크리스털로 장식된 샴페인 한 병 그리고 파리에서 마셔본 와인 두 병 이렇게 네 병을 담았다. 사실 마음 같아선 와인이고 뭐고 맥주만 잔뜩 담고 싶었다. 나는 와인 맛은 몰라도 맥주는 기가 막히게 아니까.


 내가 맥주 판매대에 서성이다 계산에 앞으로 가는데 조용히 와인을 담던 제인 언니가 본인 카트에 맥주를 두 묶음 담았다. 맥주 정도는 본인이 사주고 싶다면서 어떤 맥주를 먹고 싶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됐다고 하면서도 아이슬란드에서는 굴 맥주가 유명하다고 했고, 언니는 자긴 몰랐다면서 카트에 담은 맥주를 빼고 내가 먹고 싶었던 걸 담았다. 그날 이후에도 제인은 늘 말하지 않는 걸 채우는 사람이었다. 오두막집에서 만들어 먹었던 떡볶이도, 입맛이 떨어질 때마다 찾았던 곱창 김도, 노란 이층집에서 먹은 파스타도 전부 제인이 준비한 것이었다. 제인은 우리가 출출할 때마다 각자 할당된 준비물이 아닌 음식을 꺼내곤 했다. 자기가 먹고 싶어서 챙겼다는 말과 함께.


 무엇보다 제인은 밤마다 채팅창에 그날 찍은 사람들의 모습을 올리곤 했다. 전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제인은 누군가에게 먼저 사진을 부탁하거나 저기 앞에 서 보라고 말을 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거나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담았다.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책으로 엮자고 했을 때도 제인은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반드시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살면서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꼭 블루마블에 나오는 무인도 같았다. 흔히 무인도는 주사위를 잘못 굴려 나오는 꽝에 가깝다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인도에 가만히 서서 게임을 관망하는 순간 판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목도하게 된다. 누가 건물을 많이 지었는지, 지금 자산이 가장 부족한 사람은 누구인지. 게임에서 멀어져야 비로소 게임을 잘하게 되는 아이러니. 그래서일까. 무인도에 있으면 갇혔다기보단 게임의 최종 플레이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슬란드는 우리 모두의 마지막 여행이었고 그래서인지 꿈에서 깨지 못했다. 늘 꿈을 꾸지만 정말 꿈이 된 것만 같은 섬. 언제고 다시 가고 싶지만 장담할 수 없는 곳. 이 기억이 옅어지는 게 두려워 글을 쓰다가 제인이 여행 중간에 난 여길 부모님이랑 여름에 와야겠어, 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여행을 글이 아닌 일상에 기록하는 사람. 제인과 함께 있으면 늘 섬에서 섬으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언니는 나의 작은 무인도 우리의 최종 플레이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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