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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Dec 29. 2021

9. 일기떨기

얘들아, 나 내년에는 무언가 되고 싶다. 이제는 뭔가 되고 싶어.

올해 내가 선민이 생일 선물로 준 호보니치 사울 레이터 2022년 스케쥴러. 포토 바이 선민.





문어가 예부터 바다의 선비라 불리는 거 알아요? 투명한 바다에 새카만 먹물로 글을 쓰는 거죠. 아니, 그보다 더 신기한 건 문어의 심장이 세 개라는 거지. 언니, 나 선민이 이렇게 세 명이 문어뱅스가 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니까. 이건 운명이 틀림없어요. 그리고 문어가 바다 생명체 중에서 손에 꼽히게 똑똑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것도 익히 알고 있죠? 그런데 모르는 거 빼고 다 안다는 그 문어가 자식한테는 아무런 지식도 지혜도 물려주지 않는대요. 문어는 정말 모든 걸 이승에서 깨닫고 티끌 없이 사라지는 존재인 거야. 그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거지. 우리 세 명이서 이제 무언가 해야 해. 나는 동화를 쓰고, 선민이는 소설을 쓰고, 언니도 쓰는 사람이 되는 거야. 이게 문어뱅스의 운명인 거야.


 문어뱅스는 이날도 어김없이 서로의 매력을 돌아가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어대장 김지현이가 별안간 문어 이름의 유래부터 그 숭고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선민과 나는 군소리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 지리멸렬한 삶에서 오직 유머와 유머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 문어뱅스는, 학부 2학년 후배인 김선민과 김지현 그리고 윤소진의 사적 모임이다. 평범하게 모여 합평이나 하는 동인회로 치부하기에는 우리는 글보다 서로의 매력에 집중한다. 이때, 매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점 중 하나는 일 번, 그저 그런 형식적인 칭찬은 하지 않는다. 이번 상대의 장점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동시에 인상적이었던 포인트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마지막으로 삼 번, 전에 얘기했던 칭찬은 제외한다. 반드시 새로 발견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문어대장 김지현은 우리가 친구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난 지현이의 마음을 넘겨짚거나 애써 모른 척하기 위해 애쓴 적이 없다. 그건 그 애가 내게 늘 맑은 마음만을, 아낌없이 내어줬기 때문인데, 그렇듯 확신에 가득 찬 사랑을, 신뢰를, 마음을 아무런 부침 없이 산뜻하게 건넬 수 있는 건 지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현이가 느낌표 같은 친구라면 선민이는 쉼표다. 아침에 출근하면 선민이가 2년 전 내 생일에 선물해준 파란 줄무늬 찻잔에 커피를 내려 마신다. 그리고 올해 생일에 준 다용도 수납에서 펜을 꺼내어 오늘 할 일을 적는다. 그 옆에는 가장 작은 캔버스에 선민이가 그린 강릉 바다가 있다. 선민이와는 긴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는데 늘 그 애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긴 여행이 끝난 기분이었다. 그 어떤 아쉬움 때문에 반드시 다시 떠나야만 하는, 떠나게 될 그런 여행. 


 지난밤에는 선민이 생일을 맞아 문어뱅스가 오랜만에 모였다. 생일 주인공이 우리가 쓴 엽서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고, 결국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울고, 웃고, 다시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서울 사는 김선민 자취방에 모여 1.5리터짜리 콜라를 가운데 두고 셋이서 바닥을 두드리며 웃기도 하고 휴지로 눈물을 콕콕 찍어가며 울기도 했다. 그때, 선민이가 사랑한다 말했다. 그리고 지현이가 사랑한다 말했다. 둘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언니는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냐고 했다. 나는 괜히 이제 서로의 매력을 말할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그 누구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날. 그날도 우리는 선민이의 서울 자취방에 모여 초콜릿 케이크에 초 하나를 꽂았다. “다시 태어난 날! 다시 태어난 날! 윤소진 다시 태어난 날!” 영문도 모르는 채 내 앞에 놓인 초의 불을 껐다. 문어 뱅스만의 의식이었다. 꼭 기쁜 날만 축하해야 하는 걸까. 살다 보면 외롭고 지치고 괴로운 날이 더 많은데.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에도 비슷한 감정에 휩싸여, 어제와 다르지 않은 외로움과 자책에 시달려야 했지만 내 마음을 구체적으로 위로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얘들아, 나 내년에는 무언가 되고 싶다. 이제는 뭔가 되고 싶어.”


 문어의 삶에 대해, 바다의 선비로 사는 매끈한 두상을 가진 자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지현이는 동화를 쓰고, 선민이는 소설을 쓰고, 나도 무언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그런 모든 것보다 우리 셋이 내년에는 더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하자고. 나보다 더 대담하고, 더 강하고, 더 미더운 친구들은 저 언니는 당연한 얘기를 너무 당연하게 꺼내곤 한다며 웃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매력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했고, 밖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Q.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는 친구혹은 누구와 무엇을 했을 때 위로를 받는지

ex) 문어뱅스 (케이크에 초를 붙이는 의식)

Q. 주변에 글을 쓰는 동료들로부터 위로를 받는 순간 혹은 

특정 작가의 행보를 보고 위안을 얻은 적이 있는지?

Q.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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