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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r 20. 2023

35. 일기떨기

뉴욕으로부터 돌아오니 한국은 이미 봄이었다.



혜은의 첫 번째 밀린일기

나의 대만에게     

3년 만에 대만에 갔다. 십 수번을 갔어도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본 여행은 한 적이 없어서, 내게 이 나라는 여전히 여행이라는 말은 좀 안 어울린다. 말하자면 소개받는 기분에 가깝다. 한때는 헤맬 기회가 적다는 것이 내심 불만이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님 그동안 내 나라에서 보낸 시간이 쉽지 않아서였는지, 이번엔 매끄럽기만 한 날들에도 순순한 마음만 들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대만은 그러려고 가는 곳이었다. 사는 데 자주 필사적이고 비장해지는 나를 느슨하게 만들어주는 곳. 힘들이지 않고 사랑해 볼 수 있는 곳. 무엇이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는 것을, 긴 시간이 지나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5일 동안 사진첩을 채운 풍경들 말고 또 뭐가 남아 있을까.     

내 나라가 아닌 곳에 나를 기억하는, 나를 반겨주는 얼굴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특별했던 5일. 인연이란 무엇일까. 이해관계보다 앞서는 무구한 환대 앞에서 나는 순하고, 어려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대만을 떠나기 몇 시간 전. 전 애인의 할머니가 디즈니랜드 포장을 뜯지도 않고 간직한 네잎클로버 팬던트를 건넸을 때 나는 아주 오랜만에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할머니의 유리 장식장 안에는 여행 첫날 내가 건넨 ‘복 복‘자의 분홍색 초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져 있었다.     

지난 10년 간 내 여권에는 10개도 넘는 대만 입국 도장이 찍혔지만 떠날 때마다 ’다시 올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늘 이번 마지막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아니고- 그래야 지금까지가 정말 나의 현실이었다고 비로소 체감할 수 있을 것 같단, 그런 꿈결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은 어땠냐고? 아무것도 단정 짓거나 짐작하지 않고 대만을 떠나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다음은 잘 모르겠단 심정으로. 대만을 떠날 때 내가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뉴욕까지 14시간의 비행이 소요된다는 것뿐이었다. 기내식은 맛있고, 잠도 잘 잤고, 책도 잘 읽혔다. 책방 오픈 직후 읽다가 만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챙겨 왔는데, 모든 구절이 안 그러려고 해도 남은 날들의 암시 같았다.     





혜은의 두 번째 밀린일기

우리의 뉴욕에게     

10년 전, 그러니까 생애 첫 여권을 만들때 즈음에. 그리고 나의 오랜 친구들이 아직 뉴욕에 매료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에이스 호텔이 소개된 <매거진 B>를 보면서 나는 막연하게, 언젠가 다른 뉴요커들처럼 이 호텔에 묶기보단 로비에 랩탑을 두고 작업해보는 상상을 했더랬다. 물론 아주 짧게, 해외여행 같은 건 나랑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아주 잊고 있던 기억..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조각은 여행 막바지에 비소로 생각이 났다. 우스운 고백처럼 털어놓으니 그날 밤 친구는 나를 에이스 호텔로 데려갔다. 친구가 좋아하는 커피 마티니를 마시고, 우리 사이에 아주 오랫동안 회자될 크림 브륄레를 먹고, 아쉬워서 시킨 화이트 와인을 그러나 집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따뜻한 털친구를 생각하며 빠르게 털어넣고 겨울 거리를 걸었다.     

친구가 휴가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뉴욕에서 혼자 걸은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지만, 그럼에도 뉴욕은 나의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여행이라 불러 마땅하다. 우리가 외따로 보낸 시간들은 저멀리 지나간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곁에 차곡차곡 쌓여서 꿈 같은 10일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확인한 여행이었으니까. 시간에 겁먹지 않는 법은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함께 하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래서 대만과 달리, 뉴욕에서 나는 한 가지 확신을 갖고 돌아왔다. 우리가 다시, 계속 만나게 되리란 자명한 사실을.     

대만으로부터, 뉴욕으로부터 돌아오니 한국은 이미 봄이었다. 나는 밀린 일력을 찢어 넘기고, 에이스 호텔 카페에서 구입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밀린 신간을 읽고, 또 팔고 있다. 내 현실엔 언제나 내 상상보다 근사한 순간이 끼어 있다. 




대화 주제     

■ 태어나 가장 많은 디엠을 받은 날 

 대만 어느 사원에서 오열한 밤

 에드워드 호퍼의 밤뉴욕 공립도서관에서 만난 버지니아 울프

 개산책과 열쇠 지옥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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