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
주말이 되면 그늘 아래에는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인다. IFC몰로 이어지는 육교 위에도 페리를 타는 선착장 아래에도 있다. 지하철 개찰구 앞에도 있고, 해변의 나무 아래에도 있다. 종이 박스를 넓게 펼치고 누워서 음악을 듣거나 모래사장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음악을 크게 틀기도 하고 은밀하게 모여 지난주의 일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들을 처음 본 건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관해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우리나라 신혼부부가 아이 한 명을 양육하기 위해 보모를 고용할 경우 드는 비용은 최소 2백만 원, 그러나 홍콩과 싱가포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 보모를 고용해왔고, 그들의 임금은 80만 원 안팎이라고 한다. 평일에는 고용주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아이를 돌보며 생긴 수입의 반 이상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이들. 내가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녀들의 일상은 나오지 않았고,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보다 아이의 양육 비용에 대한 부담이 덜한 홍콩의 부부가 나와서 자신들의 생활의 윤택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의 안정적인 노동과 편리한 생활을 위해 다른 여성의 노동 가치를 떨어뜨린다,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홍콩에서는 지역마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고 이들은 주말에만 만나는 가족처럼 지낸다. 나 역시 이곳에서는 이방인이기에 내가 이들의 생활과 처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순 없다. 하지만 나는 홍콩에 있는 내내 돈과 삶에 대해 생각했다. 홍콩의 국기 옆에는 반드시 중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고, 거리는 중추절을 맞아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홍콩에서의 이튿날, 아침으로 딤섬을 먹고, 홍콩 젊은이들의 성지라 불린다는 큐브릭 서점으로 갔다. 서점 바로 옆에 있는 극장에서는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을 맞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서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의 사는 모양새가 어쩌면 전부 다 비슷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들도 좋아할지 모른다는 감각. 그럴 때마다 고개를 돌리면 중국 국기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에는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으로 향했다. “마음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感情所困無心戀愛世).”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이 말을 남기고 자신이 묵고 있던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장국영이 사랑했던, 마지막으로 묵었던 장소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겼다. 들어설 때부터 나올 때까지 온통 금빛으로 일렁이는 곳이었다. 디저트의 특별한 맛은 느끼지 못했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시 IFC몰을 빙빙 돌다가 피에르에르메 마카롱을 사 먹었다. 홍콩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같이 딤섬을 먹었는데, 이날만큼은 종일 지나치게 단 음식만을 찾게 되었다.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 내가 모르는 여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 홍콩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내일이나 미래가 아닌 과거로 가닿게 되는 도시였다. 분명, 지금의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나는 현실 감각 없이 해변에 앉아 비스듬히 누워 술을 마시는 여자의 지난주 일상에 대해 상상했다.
대화 주제
■ 저는 홍콩을 영화를 통해 사랑하게 되었어요. 두 분은 콘텐츠를 통해 사랑하게 된 나라나 지역이 있나요?
■ 홍콩은 혜은의 첫 해외 여행지이기도 하죠. 모두의 첫 해외 여행이 궁금해요.
■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 중에 기억이 남는 여성이 있나요?
■ 마지막 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디이고 싶은가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