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 정재일x정훈희
https://youtu.be/1F9oFXkk6UU?si=gZaBL-mwC0srhF6n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월이 가면>의 제목을 첫 소절인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첫 소절의 가사가 던지는 독백이 인상적이기 때문이겠지요. 유행가만큼 취향이 다른 건 없겠지만, 우리 가요 중 으뜸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이 노래를 꼽습니다.
이 명곡을 정재일의 피아노에 정훈희가 노래합니다. 정훈희가 남긴 화려한 역사는 제외하고라도 그녀만큼 고습스런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있을까요? 적당한 비음이 섞인 정훈희의 목소리는 그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보석처럼 아름답습니다. 정재일도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놀라운 뮤지션이지요. 천재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 빤한 표현입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 거기에 국악까지 아우르는 이 젊은 음악가는 작곡자로서, 그리고 연주자로서 이미 정상에 서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이 노래를 다시 부르는 순간, “아, 그 노래”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이런 노래였던가?”로 바뀝니다. 그 변화가 이 무대의 핵심입니다. 리메이크가 새롭다는 말은 흔합니다. 하지만 이 무대는새롭다기보다 차라리 정확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곡을 새로 칠하려는 욕심보다, 이 곡이 지닌 시간이 스스로 드러나게 만드니까요. 박인환이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썼다는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였던 50년대의 낭만과 허무 같은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그 태도가 관객을 조용히 붙잡는 것이지요. 지난날의 노래에 과도한 편곡을 더해 결국은 기교의 고음 잔치를 벌이는 근래 유행하는 리메이크 무대와 비교가 됩니다.
시를 노래한 작품이어서 일까요? 노래라기보다 연극의 독백처럼 기억되는 작품입니다. 그러니 첫 소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이것만으로도 이미 이 노래는 제 몫을 다 하는 것 같습니다. 정훈희의 목소리는 일부러 기교를 부리지 않고 오히려 문장이 목소리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같은 노랫말이 누군가의 회상처럼도, 누군가의 고백처럼도 들리는 거지요. 한 번도 과장된 표현을 하지 않는데도 마음은 더 많이 움직입니다.
정재일의 피아노가 그 호흡을 살려주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피아노가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는데도 계속 노래의 '장면'을 만듭니다. 이 장면은 화려한 배경도 아니고, 창밖이 어둑해지는 저녁, 또는 오래된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는 침묵 같은 종류의 공간입니다. 노래는 그 공간을 지나갑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어느 순간 노래를 듣는다기보다 한 시절을 통과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지요.
이 무대가 특히 좋은 건, 정재일과 정훈희라는 신 구의 상징적인 조합이지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정훈희는 자기 목소리로 문장을 읽고, 정재일은 그 문장을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는 것이지요. 한 사람은 시간을 살아온 목소리로 곡을 지키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목소리가 지나갈 길을 조용히 만들어 줍니다. 그 결과로 생기는 건 품격입니다. 이 품격은 누군가를 압도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정훈희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 이 노래는 청춘의 고백이 아니라 청춘을 통과한 사람의 기록처럼 들립니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세월이 만들어준 건지, 아니면 그 둘이 겹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다만 이 무대는 그 질문을 ‘설명’으로 보여주지 않고 ‘소리’로 보여줍니다. 어느 단어를 세우고, 어느 단어를 놓아주고, 문장 끝에 숨을 얼마나 남기느냐, 그런 미세한 결정들이 '세월'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대신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무대를 ‘리메이크’라고만 하는 것은 너무 불성실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읽는 지난날의 시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읽는 사람이 달라져서 텍스트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 같은 텍스트가 읽는 사람이 가진 세월만큼 달리 들리는 경험. 음악이란 게 가끔 그런 일을 하지요. 같은 노래도 백발이 성성한 노 가수가 부를 때 느끼는 기분 같은 것처럼 말이죠.
굳이 너무나 유명한 이 곡을 다시 고른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을 다시 증명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간의 목소리를 만나 다시 살아나는 진정한 명곡의 모습을 보는 행복함 때문입니다. 정재일의 피아노와 정훈희의 목소리가 만난 <세월이 가면>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노래를 새롭게 합니다.. 새롭게 하는 건, 결국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익숙한 것을 다시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것. 그게 이 무대가 만들어낸 미덕입니다.(수필/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