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빌러비드>는 이 기이한 첫 문장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갓난아기의 독기가, 한이 서려있다는 것인가?
그 집에는 한때 노예였던 세서와 딸 덴버가 살고 있고, 그 집을 떠나지 못한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은 오래전
세서가 도망치다 다시 끌려갈까 두려워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아기의 혼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죽음의 장면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이미 그 일은 '지나간 일'로 처리되고, 십수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가 열린다.
문제는 그 일이 전혀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빌러비드>에서 시간은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보다 상처를 꿰맨 자리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법적으로는 이미 노예제가 폐지된 뒤이고, 달력의 날짜는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세서와 그녀가 사는 집 124번지에는 과거가 그대로 남아있다. 집 안의 그릇이 스스로 날아다니고, 벽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은 흔한 유령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예제의 폭력, 아이를 죽여야 했던 절망, 사랑과 죄책감이 뒤엉킨 감정이 한 공간에 응결된 결과다. 마치 집이라는 존재가 시간의 무게를 더는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이 소설의 구조는 과거와 현재를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로 되어있다. 세서에게 미래란 '과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밀어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부터 밀려오는 기억을 겨우겨우 막고 서 있는 상태다. 이때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그저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를 함께 겪었던 폴 D가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곧이어 물가에서 걸어 나와 집으로 들어오는 젊은 여자 빌러비드. 세서는 그녀를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독자는 곧 알게 된다. 빌러비드는 단지 세서가 죽인 딸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노예제가 남긴 집단적 상처의 형상이라는 것을. 시간에 묻어둔 것들이 한 인물의 몸을 빌려 돌아온 셈이다. 그때부터 124번지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시간'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가 된다.
세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흘러간 것처럼 보이는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이다. 모리슨은 세서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간 이야기 하고 있었어. 시간은 믿기가 너무 어려워. 어떤 것들은 가 버리고, 어떤 것들은 그냥 남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멀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세서에게는 정반대의 감각이 찾아온다. 어떤 것들은 분명히 과거인데, 지금도 여기 있다. 그래서 그녀는 ‘기억’이라는 말 대신 ‘리메모리(rememory)’라는 단어를 쓴다. “어떤 집이 불타 없어져도, 그 자리에 대한 광경은 남아있어. 내 머릿속뿐 아니라, 바깥세상 어딘가에 떠 있어.”라고.
세서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머릿속의 기억이 아니다. 집이 사라져도 그 ‘장소의 시간’이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어서 언젠가 다른 사람의 발걸음, 다른 아이의 시선과 부딪히는 순간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기억이 뇌 속의 파일이 아니라 떠다니는 이미지라면, 시간은 결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제든 현재를 덮칠 수 있게 된다.
트라우마 이론은 이런 감각을 '나중에야 도착하는 과거'라고 부른다. 어떤 사건은 그 순간에는 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훨씬 뒤의 우연한 계기, 예를 들면 물소리, 냄새, 특정한 단어 같은 것을 통해 뒤늦게 전면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트라우마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지연된 해석' 또는 '지연된 기억의 폭발'로 작동한다. <빌러비드>는 이 이론을 설명으로 들려주는 대신, 한 집안의 일상에 스며든 이상한 시간감각으로 보여준다. 세서와 폴 D, 덴버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폭발을 버틴다. 누군가는 아예 말문을 닫고, 누군가는 기억을 조각조각 떼어 내 번호를 매기듯 분리한다. 그 사이를 빌러비드가 돌아다니며, 억지로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인다.
이 소설의 서술 방식도 그런 시간 감각을 따라간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과거로, 한 인물의 시점에서 다른 인물의 내면으로 불연속적으로 이동한다. 사건의 순서를 따라가는 대신, 마음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순간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 장면으로 이동한다. 학자들은 이를 '트라우마의 서사적 시간'이라고 부르며, 모리슨이 분절된 기억과 단절된 시간을 통해 노예제의 폭력성을 형상화한다고 분석한다.
세서가 과거를 말할 때,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갉아먹는 재현이다. 그녀는 과거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때의 공포를 다시 겪는다. “그때는 그게 아이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는 말 뒤에 따라오는 긴 침묵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심판의 시간이 묻어 있는 것이다.
빌러비드는 이름부터 이상하다. ‘사랑받는 존재’라는 뜻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녀의 사랑은 집요하고 파괴적이다. 그녀는 세서의 딸이자, 세서의 죄책감이자, 노예제의 폭력 그 자체를 한 몸에 담고 있다. 어떤 논문은 '빌러비드라는 인물은 개인 심리의 트라우마이자 집단 역사 전체의 트라우마를 껴안은 형상'이라고 말한다.
빌러비드가 집에 머무는 동안 세서의 시간은 완전히 현재를 잃어버린다. 그녀는 점점 과거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간다. 빌러비드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모든 이유를 설명해 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가 빌러비드를 향해 쏟아붓는 에너지는 사실 자기 자신을 향해 있던 비난과 용서가 뒤섞인 감정이다. 그 과정에서 세서는 집 밖으로 나가는 법을 잊고, 일하러 나가는 일마저 포기한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시간을 모조리 갉아먹는다.
고통의 시간은 대체로 과거의 한 지점이 현재를 계속 침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세서는 “그 일은 끝났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녀가 아이를 죽인 그날은 빌러비드의 몸을 통해 다시 날마다 반복된다. 어쩌면 그녀는 매일 '그날'의 오후를 살고 있는 셈이다. 폴 D가 이 광경을 보고 도망치듯 집을 떠나는 것은, 이 집의 시간이 이미 정상적인 하루의 리듬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끝나지 않는 시간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모리슨은 여기에 공동체의 시간을 데려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마을의 흑인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124번지' 앞으로 간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소리를 높여 노래하며, 집을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흔든다. 많은 연구에서 이 장면을 '공동체의 치유 의식'으로 해석한다. 개인의 고통을 혼자서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공동체가 그것을 함께 목격하고 이름 붙이는 순간, 트라우마는 비로소 공유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빌러비드는 결국 마을 여성들의 목소리와 시선 속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세서의 삶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여전히 남고,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는 달라진다. '그 일'이 더 이상 세서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소멸과 재현을 반복하던 시간이, 말과 노래와 증언 속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시간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과거가 현재를 덮쳐 와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현재가 과거를 바라보고 말하기 시작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빌러비드>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시간, 다시 돌아오는 고통의 시간'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떤 것들은 가 버리고, 어떤 것들은 그냥 남아.”라는 세서의 이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지만, 노예제의 경험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직접적인 현실이다. 몸의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 수 있지만, 채찍 자국과 구속의 시간은 세대와 세대를 건너뛰며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루었던 작품들에서 시간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프루스트에게 시간은 향기와 맛으로 되살아나는 과거였고, 가와바타에게 시간은 눈 덮인 풍경에 스며 있는 정적이었다. 포크너에게 시간은 부서져 겹쳐지는 의식의 조각이었고, 이시구로에게 시간은 너무 늦게 도착한 깨달음의 저녁이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여기에 더하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폭력의 시간, 이미 끝났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현재에 남아 있는 역사'다. 세서의 ‘리멤버리’ 개념은 프루스트의 '다시 깨어나는 과거'와도 이어지면서,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개인의 유년기를 되살린다면, 모리슨의 리멤버리는 사회적·역사적 폭력을 되살린다.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세계에 떠 있는 기억의 파편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빌러비드>를 읽고 나면, 어떤 종류의 시간은 '지나갔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고통은 과거형으로 말하는 순간 다시 현재형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그 고통을 완전히 지우는 대신 함께 바라보고 말하는 시간 속으로 옮기는 일만이 작은 해방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빌러비드>는 한 집의 유령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나라의, 한 민족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과거는 저절로 멀어지지 않는다. 잊기 위해 눌러놓은 것들이 언젠가 다시 떠올라 우리의 현재를 갉아먹는다. 그러나 그 고통을 말해도 된다고, 함께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 순간 시간은 다른 힘을 갖게 된다. 토니 모리슨은 그 다른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첫 발걸음을 '124번지'에서 시작되는 문장 속에 숨겨 두고 있다.(수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