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버지가 변전소 소장이던 친구가 있었다. 그 애는 변전소 살벌한 철조망 울타리 안 예쁜 사택에 살았다. 그 애의 집에 놀러 갔더니 현관에 마네킨의 팔을 떼어놓은 것 같은 커다란 고무장갑이 한 켤레 매달려 있었다. 신기하여 어디에 쓰는 것이냐 물으니 "변전소에 고압선을 검사할 때 쓰는 건데, 저 장갑을 끼고 고압선을 건드려 손이 튕겨 나오면 전기가 통하는 거고, 안 튕기면 전기가 통하지 않거나 끊어진 거야. 그리고 그건 위험해서 아무나 할 수는 없고, 울 아빠 같은 소장쯤 되는 사람만 할 수 있어. 그런 사람이 전국에 몇 없대" 라고 대답했다.
믿었다. 그게 아니면 손가락도 구부릴 수 없는 그 무겁고 큰 장갑을 어디에 쓰겠는가. 더욱이 그애가 덧붙인 이야기는 그나마 티끌만한 의심조차 날려버렸다.
"그런데 그때 고압선을 손등으로 툭 쳐야지, 만일 깜빡하고 손바닥으로 잡았다가는 반사적으로 움켜쥐게 돼 고압선에 들러붙어 타 죽어"
고작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녀석의 설명은 너무나 그럴듯했다. 나도 고압선을 만지면 자석처럼 끌려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걸 기계로 하지 왜 위험하게 사람 손으로 하느냐는 질문에도 녀석은 이미 준비가 돼있었다.
"그 건 워낙 고압이라 잴 수있는 기계가 없거든. 선에 대면 다 타버려. 그래서 할 수없이 사람이 하는 거야. 울 아빠 같은 사람은 손을 대서 탁 튕기는 반응으로 이건 몇만 저건 몇만 이렇게 몇만 볼트인지 딱 알아"
이후 녀석과 어떤 이유인지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가끔 텔레비전에서 사기꾼이 잡혔다는 뉴스가 나오면 문득 생각난다. 나도 녀석의 사기 기법에 깨달은 바가 있어, 간혹 사기 칠 일이 생기면 잘 써먹는다. 사람은 의외로 어리석다. 한두 가지 그럴듯한 예를 들면 전부를 믿는다. 굳이 모든 것을 속이려 애 쓸 필요가 없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 것같다. 누구나 그 수법을 알고 있으며, 그 수법을 통해 다들 먹고산다. 다만 그 수법을 두고 사기라 하지 않고 기법이며 기술이라 부를 뿐. 지식이라 부르며 교수가 되는 사람도 많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