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산새
‘산새’에 꽂혔다. ‘산쌔’라고 발음되는 그 정겨운 보통명사라니! 산새는 신석정 시인이 그리도 좋아했던 산을 누비거나 바라볼 때 ‘데불고(데리고)’ 다니던 시어(詩語)다.
“포르르 포르르…갸륵한 산새들은…머언 삼림의 소박한 궁전을 찾아가 그들의 화려한 푸른 꿈을 짜낸다 합니다.”(‘은행잎을 바라보는 마음’ 중)
“강 건너 숲…빈 보금자리가 늦게 오는 산새를 기다릴까요?”(‘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시인은 산새를 좋아하고 걱정하고 부러워한다. 그 산새와 더불어 산속을 거니는 시인의 시 속엔 안온함이 담뿍 배어 있다. 산새의 거처는 그냥 둥지가 아니라 ‘보금자리’이고 ‘소박한 궁전’이다.
아예 시인도 산을 거처 삼는다. (봄이) ‘명랑한 녹색 침대(초원)’를 가져오고, “저 아득한 먼 숲의 짙은 그늘 밑에서 평화한 밤을 준비”한다고 믿는다. 산이라는 ‘고요한 품안’을 떠나오면 되겠냐고 ‘산으로 가는 (시인의) 마음’을 산에 내버려 두고 온다.
그런 안온함의 시 속에선 의성어도 여음을 남긴다. “투욱 툭 여문 밤알”, “저 감을 또옥 똑 따며”.
나무들도
5월 24일 기행 날 새벽까지 비가 내려 ‘치웁다(춥다)’ 할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는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촛불처럼 조심스런 황혼이 올 때까지”. 그렇다고 덥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국경이 있어본 일이 없다는 저 하늘”(‘지도’ 중) 위엔 어둔 구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구름들이 비막이처럼 ‘햇빛막이’가 돼준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땅 위의 산새가 되어 부안이라는 안온한 ‘숲속’을 헤치고 다닐 수 있었다. 마파람(남풍)도 잠든 날이었다.
남향 버스 안엔 부산함이 가득했다. 아침식사 대용 떡과 간식이 푸짐하게 분배되었다. ‘촐촐할(배가 조금 고플)’ 틈이 없었다. 반가운 인사와 수다도 오고갔다. 나무들처럼 말이다. “우리들이 만나면 / 서로 이야기하듯 / 나무들도 / 모여 서선 이야기하나봅니다”(‘나무들도’ 중)
대나무와 산
작가론 발표자를 통해, 1907년생인 시인은 어려서부터 동서양의 문물, 문학을 접했음을 알았다. 베르테르를 흠모하고 도연명을 이상형으로 삼았다.
시인의 시 속엔 ‘어머니’를 비롯해 ‘대나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대바람’, ‘대숲’, ‘푸른 대’ 등으로 변용되면서.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대숲에 서서’)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대나무)로’ 중)
그런데 성글어서, 빽빽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성글어서 햇볕이 가득 들어온다. 덕분에 대숲은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하다. 그 사이로 대바람이 분다. 기꺼이 산보할 만하겠다. 이렇게 시인은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살았다.
작품론 발표자를 통해 목가적이던 시가 큰 변화를 이룸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첫 시집 『촛불』 속 푸른 하늘과 흰 뭉게구름이 가득한 산, 시인이 좋아한 전원풍의 산은 조금씩 자취를 감춘다.
1947년에 발간한 『슬픈 목가』는 일제 때 전방위적 고통을 겪으며 쓴 시들이라고 했다. 세 번째 시집 『빙하』에서부터 현실과 민중을 대변하는 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육이오, 5·16 쿠데타를 겪으면서.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다섯 번째 시집 『대바람 소리』에서는 이전과 달리 산이 구체적인 지명을 달며 등장하기도 한다.
“무심코 나도 뒹굴고 싶은 산골엔 헐벗고 굶주린 자취가 없다.”(‘지리산’ 중)
“나도 이대로
한라산 백록담 구름에 묻혀
마소랑 꽃이랑 오래도록 살고파
까마득 하산을 잊어버리라.(‘백록담에서’ 중)
자세하게 언급한 시 ‘서울 1969년 5월 어느날’에도 중앙정보부(여러 날 고초를 겪은)가 있는 남산이 등장한다. 보통명사의 ‘산’에서 고유명사의 ‘산’으로 부각됐다. 이 점은 나중에 만난 해설사의 표현을 통해 수긍할 수 있었다. ‘바라보는 산’에서 ‘역사를 증언하는 산’으로 변모했다고.
서정소곡
‘편안한 고을’ 부안군에 귀촌해 살고 있는 해설사에게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신석정문학관에서다.
아일랜드의 서정시인 예이츠가 신석정 시인의 시를 영역했는데, ‘임께서 부르시면’이 그 시라는 것, 보통학교 때 담임이었던 이익상 선생 덕에 시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 시 한 편이 한 사람과 맞먹을 수 있다는 것 등 모두 새로 접한 사실들이라 귀가 솔깃했다.
사진 속 고택 ‘청구원’은 구상 시인의 ‘관수재’ 같은 서재 이름이 아니라, 시인이 소작농과 소시민으로 가족을 꾸리며 산 집의 이름이다. 첫 두 시집이 이곳에서 쓰여 중요한 곳이다. 1935년에서 1952년까지 살았다.
“철따라 꽃이 피고 지는 속에 아쉬운 대로 책을 읽는 한가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고 밤에는 고풍한 램프불 밑에서 혹은 촛불 옆에서 시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산문 ‘나의 교우록’ 중에서). 또 벗들이 오면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었다. “산같이 첩첩이 쌓인 우리 빛나는 설계를 / 밤새워 조근조근 이야기하고 싶고나.”(‘서정소곡’ 중)
별나라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시인의 어리고 젊은 시절(1920~1930년대) 자연과 지금 시대 자연 풍광은 얼마나 다를까 하는. 도심이든 소읍이든 인공조명이 없고 공기가 ‘안 보이던’ 시절(시인은 “서울은 공기가 보이는 곳이다” 했다), 은하수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의 자연은 얼마나 생생했을까 하는.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줄 수가 없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중)
다행히 부안에서 별을 보았다. 어느 동행자가 그랬다. 내소사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 사이사이 단풍나무는 잎이 작아서 올려다보면 별처럼 보인다고. 정말 그랬다. 별나라이다. 전나무 잎은 그 거대한 키에 걸맞지 않게, 작고 길쭉해 오히려 정겨웠다. 두 종류 잎이 녹색 터널을 만들며 편안한 마음이 드는 절, 내소사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상채기
채석강 대신 들른 샤스타데이지 꽃밭은 변산 마실2길에 있다. 언제나 하얗게 눈이 쌓여 있는 미국 샤스타 산을 따서 이름 지었다 한다.
옆에 변산해수욕장이 있고 멀리 위도가 보인다. “바다 건너 연산이 푸르게만 보이던 길”의 연산을 위도의 연산(잇대어 있는 산)이라 여겨 본다.
이곳엔 예전, 간첩을 막는 철조망도 참호도 그대로 남겨져 있다. 철조망엔 사랑 고백 문구가 새겨진 조가비 껍데기들이 달려 있고, 참호 위엔 데이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부패한
문명이 문드러지다 지쳐
지쳐서 남기고 간
전쟁 같은 이야기라거나
그 무성한 상채기가 남긴 이야기는
새는 날에 앞서
이내 종막을 내려야지!(‘저 무등같이’ 중)
감꽃
귀경 후 며칠 뒤 감꽃을 보았다. 어둔 저녁 부러 찾아 발견했다. 다행이다. 식사 때도 이야기 나눴지만 어렸을 때 감꽃 목걸이 만들어 본 이들 많을 터. “하얀 감꽃 꿰미꿰미 꿰이던 것은 / 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거니”(‘추과삼제’ 중).
신석정 시인의 시를 많이 인용하고 시어를 소제목으로 삼아 이 글을 완성했다. 나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시인의 초기 시가 더 좋다. 균형 안 잡힌 편애다. 그러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6월 중순 이 글을 정리하면서 든다. 서정 가득한 짧은 곡(글)을 나도 자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