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바다, 부산

by 박태신

바다 펜션

크루즈는 처음 봤다. 거대하면서도 날렵했다. 이름은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부산역 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정착해 있었다. 승객들은 나들이를 하고 있는지 선박 안팎은 한산했다.


저층 외곽 복도 천장에 붉은색 테두리 두른 구명보트가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앙증맞아 보이지만 중형트럭만큼 크다. 특히 눈에 띈 건 바다색 유리 안전판의 발코니가 달려 있는 수백 개의 객실. 일명 발코니룸. 바다 위에 수십 채 펜션이 질서 있게 운집해 있는 듯했다.


뭍을 떠난 펜션 발코니에서는 뭍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뭍에 있는 나로서는 바다가 선망의 대상인데, 선망의 장소 바다에서 본 뭍은 그리움의 대상일 것 같다. 현관문 열고 발을 내디딜 수 없는 바다 위 펜션. 그 안의 객실 발코니. 마치 호화로운 성 꼭대기 공간에 갇힌 공주가 안타까이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마을과 자연이 뭍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그곳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뭍은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섬 시야 속 뭍과는 다른 느낌일 것이다.


부산항과 크루즈 주변은 ‘부산친수공원’이다. 물과 친한 공원. ‘바다와 도심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휴식 공간’. 공원 주위를 에워싸며 흐르는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짠내 나는 바닷물이 뭍 공간 속으로 들어가 둘러보고 돌아가는 산책로.


배가 고프다. 자갈치 시장 내 ‘우리보리밥집’은 부산 올 때마다 첫 끼니를 때우는 곳. 크루즈 펜션을 뒤로하고 지하철 부산역으로 향했다.



바다 다리

10월 중순의 가을바다를 을씨년스러운 11월 중순에 소개하려 하니 겸연쩍다. 감흥이 이제 오니 어쩌랴. 더 춥기 전에, 가을이 떠나기 전에 소개하고 싶었다.


2박 3일의 부산여행 동안 매일 바다를 보았다. 되도록 여러 군데를 방문하는 여행이 아니라 쉬기 위한 여행이었다. 바쁜 일정을 마무리한 뒤 뒤따른 3일간의 휴무. 내 마음의 고향 부산을 여행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가을바다는 해수욕의 여름바다보다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셌다. 오래 머물게 만든다. 광안리해수욕장이 우선 그랬다. 모래사장을 걷고, 밀려오는 파도와 사랑싸움을 하는 산보객들은 느림과 느긋한 상념에 빠져 있는 듯했다. 금방 지워질 모래 위 발자국은 아랑곳 않는다. 한 겹 한 겹 밀려오는 파도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연이은 파도자락은 공항을 앞두고 불을 밝힌 채 줄지어 착륙 순서를 기다리는 항공기 같다.


망각의 어둠 속에 지금도 나는 못 잊어.

그대가 들려주던 노래, 그대와 나의 노래,

그대는 나를 나 또한 그대를 사랑하고 아끼며 꿈결같이 지냈건만

다정하던 우리, 말없이 돌아서야 했네.

모래 위 그대와 나의 따로 난 발자국도 바닷물로 지워지네.

--(이브 몽땅의 <고엽> 중. 앞선 글 ‘이 가을에 만난 것들’에 소개한 가사 다음 구절)


그렇게 머물다가 근처 스타벅스에서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광안대교를 바라보았다. 수첩에 글이 절로 써진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지금 부산에 있어.’ 서울에서의 과거와 미래를 보이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해질 무렵 광안대교 한가운데서 노란색 가로 조명이 켜졌다. 해넘이 시간이 다가올수록 색은 도드라져 갔다. 수첩을 접고 다시 모래사장을 걸었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조명과 바다에 이끌려 발걸음을 더디 했다. 이내 대교 근처에 떠 있던 배가 미니 불꽃놀이를 펼쳤다. 사람들 사이에 낭만이 퍼졌다. 그러고 보니 나도 덩달아 두세 시간 이곳에 머물렀네.


나는 그 낭만이 활활 타오르도록 부산대학교 근처 김해뒷고기 원조집으로 향했다. 늦은 나이 부산대학교 대학원 다닐 때의 나의 단골집.



바다 구름

부산 지하철 안에서는 다음 역 안내방송에서 갈매기 소리와 배 기적소리를 들을 수 있다. 2호선 해운대역 도착 전 방송이 그렇다. “끼루룩 끼루룩... 이번 정차역은...”


해운대는 여전했다. 해운대해수욕장으로 향하는 보행자 중심의 넓은 거리에서는 수평선이 지표면보다 높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해운대>에서처럼 바닷물이 통째로 밀려올 것만 같다.


예전엔 부산 사람들은 잘 찾지 않는다는 유명 관광지 해운대는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곤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해수욕장 모래사장 뒤 벤치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것이다. 오래오래 바다를 바라보았다. 라보길 랐기 때문이다.


오전의 해운대해수욕장 바다는 늦은 오후의 광안리해수욕장과는 바라보는 느낌이 달랐다. 우선 멋지긴 해도 걸리적거리는(?) 것(광안대교)이 없다. 거기에 달맞이 고개에서 동백섬까지 사람의 시야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폭이 넓다.


갈매기와 비둘기가 같이 머무는 모래사장. 10월의 해운대는 한산하다. 때로는 단체 관광객들이 방문하지만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오래 남아 있는 이들은 한둘, 서넛의 산보객과 여행객. 10대 소녀들 셋이 발랄한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뛰어논다. 연출자, 카메라맨, 배우 셋이 바닷가를 거니는 장면을 찍는다. 수영복 팬티만 걸친, 온몸이 검게 그을린 중년남성이 입수 금지 기간에 철렁이는 물속을 드나든다. 외국인 가족이 모래사장에 누워, 누워 있는 바다와 눈맞춤한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바다는 평온했다. 대신 거대한 적란운들이 바다 위에 바다 넓이만큼 부피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심 위 구름과 다르다. 바다 위 구름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를 읽었지만 구름 분류 이론은 여전히 헷갈린다. ‘저 구름은 권적운이야’ 하다가도 그렇게 이름 맞추기 하다 보면 가슴이 딱딱해진다. 내겐 그저 올려다보고 감탄하고 미소 짓는 게 더 나은 구름 보기 방식. 나는 구름관찰자라기보다 구름감상자다.



서울역행 열차 안. 시간이 없어 역에서 산 어묵으로 저녁을 때웠다.


해운대의 바다와 구름은 쉬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한없이 바라봐도 지겹지 않았다. 해운대뿐이랴. 사방이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 찬 도심에 사는 나에게 부산의 가을바다는 해우소다. 버리고 가니 내 덕에 서울 가는 열차 발걸음이 가벼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 가을에 만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