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태신 Aug 06. 2019

물도둑

낙화암이 있는 부여 부소산성에 표를 끊고 입구에 들어서니 반갑게도 바로 앞에 약수터가 있었다. 무더운 날이었다. 수도꼭지를 틀고 약숫물을 막대 바가지로 받아서 마실 수 있게 돼 있었고 덕분에 시원하게 해갈할 수 있었다. 생수병에도 담았다.


낙화암 아래 절벽에 위치한 사찰 고란사 극락보전 뒤편에는 특이한 약수터가 있다. 백제시대 때 약수터 주변에 고란초라는 귀한 풀이 자라고 있었고 이 이 약숫물을 좋아했는데, 궁녀들이 고란초 한두 잎 따서 물동이 물 위에 얹혀 바치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다. 귀한 것이고 많이 나오지도 않아서 차마 물 줄어둔 생수병에 담지는 못하고 기다란 국자 같은 것으로 떠서 마시기만 했다.   


여행하다 끼니를  때우러 식당에 들르면 꼭 들고 다니는 작은 생수병에 물을 채우고 나온다. 예전에는 주인장의 양해를 구하고 넣었다. 물도 돈이라 그냥 가져가면 왠지 훔쳐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뻔뻔해졌다. 식사하며 물도 많이 마시고 주인장이 음식 준비하는 동안 생수병에 물을 담는다. 7월의 더운 날씨에는 마실 물이 한없이 필요하다. 떨어질 때마다 생수병을 사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괜한 비용이 드는 것 같다.


공주 산성시장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손님이 없는 어중간한 시간에 아주 작은 콩국수집에 들어갔다. 인심이 후한 주인아주머니는 TV와 선풍기를 틀어주었고 콩물도 가득 담아주었다. 정말 시원했다. 다 먹고 나서 내가 생수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선수 쳐서 물도 떠가라고 다. 이런 집에서는 현금을 내지 않을 수 없다.


2010년 겨울 3개월 동안 경상남도 함양에 기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여행했던 곳 중에 살기 좋은 작은 도시로 이곳을 점찍어 두었기 때문이다.


함양에는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이라는 멋진 숲이 있다. 이곳에 유명한 약수터가 있다. 월세방에서 이곳까지 산책 와 2리터 생수병에 물을 담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상림은 언제 가도 질리지 않았는데, 그렇게 돌고 나서 약수터에 들러 물을 마시곤 했다. 상림은 거의 평지인 곳에 조성돼 있고 산은 한참 뒤에 떨어져 있는데 겨우내 풍족하게 약숫물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지금은 뜸해졌지만 스타벅스에 글 쓰러 갈 때도 생수병을 꼭 가지고 간다. 3300원 하는 ‘오늘의 커피’ 제일 작은 사이즈 시키고 작업을 한다. 물을 자주 마시는 편인 나는 물이 떨어지면 카페 물도 가득 담아가지고 와서 시시때때로 마신다.


공주를 여행하다 신기한 장면을 보았다. 읍내 제민천 근처 당간지주가 있는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물이 담긴 그릇이 세 개나 놓여 있었던 것이다. 분명 길고양이나 새들이 마시게끔 어느 마음 착한 이가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흐뭇했다. 누구는 가는 곳마다 자기가 마실 물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는데 키우지도 않는 동물이 마실 물을 챙겨주는 이가 있다.  


그나마 물 인심이 후한 나라에서 살아서 좋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약수터를 비롯해 공원이나 관광지의 수돗가 등 물을 공짜로 마실 공간이 간간이 있다. 물을 많이 마시는 내겐 정말 다행이다. 나는 물을 잘 가져가는 물도둑이다. 길에 떨어진 돈이나 주인 없는 물건, 자판기 거스름돈함에 앞선 손님이 두고 간 동전 같은 것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그걸 주우면 횡재한다는 생각이 없다.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 주인이 잘못 계산해 돈을 적게 받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돌아가 나머지를 주고 나온다. 훔치는 에 대한 개념이 내겐 없다. 공짜 물건을 가져가는 일도 익숙지 않다.  


그런데 물은 잘 가져간다. 가져가도 되는 곳이기에 그렇기는 하다. 육체노동을 할 때는 물을 아낀다는 개념이 싹 없어진다. 원없이 마신다. 나는 눈총 받되 신고를 당하거나 는 받지 않는, 그런데 소심할 정도로만 떳떳한 물도둑이다.

작가의 이전글 보고 싶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