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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witter Aug 15. 2023

누구를 위한 삶인가 - 1

소리쳐 보아도

 최근 번아웃이 심하게 왔다. 6개월마다 반복되는 강의를 n년째 진행하면서 분명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딱히 지식에 대한 엄청난 열망이나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교육에 대한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번아웃이 강하게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첫 시작은 분명, 교육이라는 것에 대한 선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생(先生)으로서 알려주는 삶의 지혜와 내가 갖지 못한 지식을 전파해 주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을 입학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그 꿈을 키워나갔다.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교육 봉사와 교생 실습을 통해 마주했던 공교육의 실상은 내가 꿈꿔왔던 이상향의 그것과는 많이도 틀어져 있었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관료제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에 들떴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그래.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건 변명이고 임용 합격할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해.'


 그래, 먹고는 살아야지라는 심정으로 졸업과 함께 나는 미술 학원의 강사로 취업하게 되었다. 입시 미술학원이 아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미술 수업을 지향한다는 모토가 마음에 들어 지원하였고, 면접을 보는 날 원장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꽤나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생각했고, 매 년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커리큘럼을 준비하고,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 볼 수 있도록, 서울 도심 속에서도 그 풍부한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는 말에 감화되었다. 처음 맡게 된 일은 200명 남짓의 원생들의 스케줄 관리와 커리큘럼 작성이었다. 아이들마다 나이가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원하는 바가 다르고, 또 아이들을 맡게 될 선생님들마다 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다 보니 그것들을 잘 분류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물론, 수업도 직접 진행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내가 일을 정말 `잘` 하는 줄 알았다. 대부분의 학부모분들은 내 수업을 좋아했고,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곧 잘 믿고 따라와 주셨다. 그러나 진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원장님이 미술 교육과 출신이시라 잘 알아요." "대학교에서 아동 심리 전공 하셨대요." "지금 박사학위 준비 중이시래요." "논문 관련 해서는 민감하셔서 비밀로 해달래요." "아 그래서.... 확실히..."


 거기에 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만들어진 내가 있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과 뒤섞여 검증할 수 없는 거짓들이 그럴듯하게 섞여있는 가짜의 내가 있었다. 말로 먹고 살아가며 처음으로 느낀 말의 무서움이었다. 우연하게 알게 된 검은 진실에 혼란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나를 속여보려 했다.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나를 잘 따랐고, 나날이 풍부해지는 아이들의 표현을 보며 사실이 어떻든 나는 내 할 일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다.




 "저도 선생님처럼 미술 선생님 하고 싶어요."


 평소에 말은 잘하지 않았지만 그림은 곧잘 그리던 아이였다.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자신만의 세상을 그리며 상상력이 풍부했던 아이였다. 15살 때의 나는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색감을 다채롭게 사용하던 아이였다. 세상을 보는 눈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생각을 가진 아이였다. 아이의 물음에 나는 선뜻 답변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내가 그 나이 때쯤, 꿈꿔왔던 것처럼.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술 선생님을 보고 미술 선생을 꿈꿨던 나처럼 그 아이의 꿈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학원 수업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지만, 학원을 마치고 부모님이 데리러 오실 때까지 학원에 남아서 계속 그림을 그리던 아이었기에, 우리는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구성원은 다양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중학생 3명과 어릴 때부터 이 학원에 다니고 있던,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 2명, 그렇게 총 5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미대를 꿈꾸고 있었다.


 "다들 미술이 계속하고 싶은 거야?"


 미술 학원에서 미술이 계속하고 싶은 거냐는 질문이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곳은 `창의력` 학원이지 `입시 미술` 학원이 아니었다. 입시 미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네!"


 아이들은 입을 모아 합창하듯 대답하였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그림을 취미로, 단과 학원을 가기 전, 마음껏 표현하는 것, 그리고 만드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며 학원을 다니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로 나누던 이야기들 중 학업에 대한 이야기들도 대부분,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었다. 벌써부터 전공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대학을 다니는 사촌 오빠, 형들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공대를 가겠다거나 외대를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한 번도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런 아이들이 미술을 계속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갑작스러운 변덕은 아니었던 듯이 사실은... 이라며 꺼낸 이야기는 생각보다 진솔한 이야기들이었다.


 "엄마는 미대가도 좋다고 하는데... 아빠가..."

 "우리는 아빠는 된다는데 엄마가..."

 "저는 솔직히 미대 가면 먹고살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공대 아무 데나 가려고 했던 거예요."

 "저는 그림을 잘 못 그려서 가면 힘들 거 같았는데,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생각보다 일이 커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술 - 미술 학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보육 학원에 가까운 - 학원의 부원장일 뿐이었다. 그것도 `미술 교육과` 를 졸업한 `컴퓨터를 잘 다루는 남자`라는 이유로 얻은 완장 밖에 없는 일개 강사였다. 하물며 우리 학원은 입시 미술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 만한 역량이 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내가 함부로 결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든 생각은,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은 줘 보자는 것이었다.


 "그럼... 여러분들 지금도 물론 잘하고 있지만 우리 간단한 테스트 같은 거 하나 해 볼까요?"

 "시험이에요?"

 "아뇨! 그냥 한 번 평소랑은 다른 걸 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얘기하고는 나는 연필을 들어, 간단한 구와 직육면체, 삼각 뿔을 그렸다. 기본적인 형태와 명암만 구분할 정도로만, 그리고는 학원 구석에 박혀있던, 석고 모형들을 가져와 아이들의 앞에 세워 놓았다.


 "소묘, 학교에서 혹시 해 본 적 있어요? 지금 제가 한 것처럼 요렇게 연필만 가지고,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밝고 어두운 부분을 표현해 보는 거예요. 대신에,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게 아니라 앞에 있는 모형 보고 그리는 거예요. 어때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게 나는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단과 학원에 데리러 가기 전까지의 자투리 시간에 기초적인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냥 신기해하고, 그동안 하던 것 - 주제를 정하고, 정해진 주제를 원하는 재료로 표현하거나, 자신만의 동화책을 만들어 본다거나, 풍경을 그린다거나 - 와는 다른 것을 배운다는 사실에 아예 정규 수업시간까지 끌어와 진행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장 선생님과 학부모님들과도 이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미대를 보내는 건 좀..." "공부한 게 아까워서..." "홍대 갈 수 있나요?" 등등...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나 역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oo이랑 ㅁㅁ이는 고등학생이라 정말 미대를 준비하려면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직 중학생이라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도 입시 미술은 고2 때부터 시작했었는걸요."

 "아이들이 미술학원에서 그림 그리면서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좋아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아요. 입시 준비하다 보면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천천히 기본적인 것들만 준비해 보면서 알아가 봐요."

 "요즘은 미대도 공부 잘해야 갈 수 있어요. 공부는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그걸 부모님들도 그렇지만 아이들 본인들이 잘 알아야 해요. 그 이야기는 제가 지속적으로 할게요."


 부모님과 원장 선생님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원 수업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진행하며 또, 공부에도 집 줄 할 수 있도록 설득해 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수업 시간 이후에도 어차피 마감전까지 퇴근도 못하니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봐준다는 이야기를 마다하지는 않으셨다. 보통 아이들은 그 시간에 폰 게임을 하거나 했었으니, 그 시간에 그래도 `미술 공부`를 하는 게 더 낫지 않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어 달 때쯤 시간이 흘렀을까. 일련의 사건은 조금 더 큰일이 되어 돌아왔다.




 학원을 잘 다니고 있던 학생 중 하나가 돌연, 보이지 않아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이제 학원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더니, 입시 미술 학원에서 시험을 봤는데 결과가 좋지 못해서 미대는 포기하는 걸로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미술 학원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대학 입시 시험을 치기 위해 학원을 갔으나, 학원 입원 시험에 떨어져 미술을 그만두었다고?'

 '나도 그랬잖아. 처음 번 아르바이트비로 학원에 갔을 때, 학원에서 안된다고 했었잖아.'

 '그때는 부모님 몰래 아르바이트비로 학원 등록하려고 했었으니 안 됐던 거지.'

 '어쨌든, 안 받아 줬었잖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연락하는 것은 당연히 안될 일이고, 이미 학원 등록을 취소한 학부모님께 연락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연락한다고 해서 뭘? 내가 거기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렇게 한 아이가 학원을 그만두게 되고 난 후,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등록되어 있지 않은 번호는 받지 않는 성격인지라, 무시했지만 몇 번이고 걸려오는 전화에 급한 일인가 싶어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고, 수화기 너머로는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술 선생님이 하고 싶었다던, 15살의 원생이었다. 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다 쉬어버린 채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아직 감정의 격분을 다스리지 못했는지 훌쩍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자신도 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 가 궁금했지만 그런 것을 물어볼 겨를은 없었다. 그저 자초지종만을 간단하게 물었다.


 "미대 갈 거면 집에서 나가래요. 미술 학원비도 저보고 알아서 벌어서 다니래요. 그러면서 수학 학원도, 영어 학원도 미대 갈려고 공부할 거면 필요 없다고 다 끊어버릴 거니까 알아서 하래요."


 머릿속에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미대를 가려면 성적이... 영어가... 학원 비가... 입시 미술 학원 등록비를 내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몰래 알바를 하며 벌었던 첫 월급으로 학원비를 등록했던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하찮은 공감만으로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은 늦은 시간이었기에, 아이를 달래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길에 올랐다.


어쩐 일인지 평소라면 점심은 넘어야 출근하실 원장 선생님이 나보다 일찍 학원에 도착해 계셨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OO 부원장님, 잠시 저랑 얘기 좀 하실까요?" 라며, 재료실 (베란다를 불법 증축하여 만들어 놓은 창고)로 불러내셨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지피시며 - 이때 이미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  말을 이어 나가셨다.


 "중고등부 아이들, 입시미술 가르치시는 거 그만하세요. 그리고, 이제 초등부 아이들 커리큘럼도 쌤 말고, 다시 제가 관리할게요."


중, 고등부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으니 이해하였지만, 초등부는 왜?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유는 간단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수업을 들은 아이들이 그림을 '아이들처럼'그리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로 학부모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중, 고등부 학생들에게 입시 미술을 가르치고, 미대를 가도록 종용하였다는 이유였다. 


 '아이들처럼 그리는 게 뭔데?'

 '초등학교 3학년이 난화기 ~ 전도식기 수준의 표현밖에 하지 못하는 것들'

 '그게 아이들처럼 그리는 거야?'

 '그게 순수하고 귀엽게 느껴지기는 하지'

 '그건... 그냥 아직 표현을 잘 못하는 거일뿐이잖아...'


 "아, 그리고 이제 애들 수업 시간 끝나면 애들 봐주지 말고 전에 부탁드렸던 학원 홈페이지 제작에 힘써주세요. 아니면 일찍 퇴근하셔도 돼요."


 제 퇴근시간은 오후 6신데요. 평소엔 12시에 퇴근하는데요 선생님...이라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내가 좋아서 남아서 하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내가 맡았던 아이들을 원장 선생님이 수업을 대신하게 되는 것으로 넘어가게 되고, 나는 사무실에서 문서 작업만 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학부모님들은 원장 선생님이 수업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말에 매우 기뻐하셨고, 약 2주가량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내가 수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무실에는 내가 있었고,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나와 인사하며 다음에 보자며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여주곤 하였다. 원장 선생님과의 시간이 즐겁구나라는 생각에 아직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였다.




 이후의 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3주째가 되었을 때, 갑작스레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원생의 20 퍼 센트 가량이 휴원하였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다던 신입 강사가 한 달 만에 퇴사 의사를 밝혔고, 그 분과 친하게 지내던 3명의 다른 강사가 함께 퇴사 의사를 밝혔다. 갑작스레 강사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수업을 맡게 되었고, 미대를 보내고 싶어 하는 학부모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반을 옮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련의 사건이 있기 전, 내가 맡았던 반의 아이들의 요청이었을 뿐이기에 요청이 이뤄지는 경우는 없었다. 사단이 그쯤 되자, 원장 선생님은 결단을 내렸는지 나를 또다시 재료실로 불러 세우셨고,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독단적으로 판단하신 일들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우리 학원은 창의력을 기르는 데에만 몇 년을 힘을 쏟았는데 이렇게 돼버렸네요. 그래도 피해 보상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너무 매정하니까, 대신에 그동안 작업하셨던 커리큘럼 등은 다른 학원에서 또 사용하시지는 않았으면 하니, 여기 계약서에 사인해 주시고, 다음 달까지만 근무하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퇴사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퇴사를 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나에게 미술 수업을 해달라는 것도 지겹게 느껴졌고, 계약서상 퇴근 시간은 6시인데 왜 나는 12시까지 남아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맡은 반의 아이들이 아닌데도 종종 내 반에 들어와서는 어느새 놀고 있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도 슬슬 지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던 시점이다. 야근 수당이라도 주던가. 갑자기 주말에 출근해 달라고 했으면 그거에 대한 보상이라도 제대로 해주던가. 하다 못해 4대 보험이라도 제대로 들게 해 주던가... 하는 생각이 한참 치밀어 오르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라 버렸다.


 '전부 돈 얘기네?'

 '그럼 뭐, 자원봉사라도 하게?'

 '아니, 아이들이...'

 '내가 대단한 무언가라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니? 네가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무보수로 아이들한테 미술 수업을 하고 있던 나 자신에 대해서 엄청난 사명감이라도 느끼고 있었니? 아니면 그런 나를 누가 알아봐 주길 바랐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아이들이...'

 '그럼 돈 안 받고 일할 수 있어?'

 '그건 아닌데...'

 '그럼 그런 생각하면 안 되지.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야. 그게 싫다면 다른 일이나 알아봐. 다른 더 재밌고 돈 많이 버는 일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어. 그리고 그러려면 나 자신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연필 조금 끄적이는 거랑 그거 가지고 입 터는 것. 딱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면서 뭘 얼마나 더 대단한걸 바럤던거야? 존경? 감사? 아니면 더 많은 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학원을 그만둔 나는 약 2달 가까운 시간을 사람을 피하며 지내게 되었다.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도무지 불편해 무언가 말을 나누기가 싫었다. 차마 이야기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학원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사람에 대한 신뢰를 망가뜨렸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과 모멸감이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미술과 교육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갑작스럽지만 미술을 제외하고 그나마 관심있고 재밌어 하면서 혼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나서다가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게 되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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