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아플까
관용 표현 중에는 눈과 관련된 말들이 참 많다. '눈을 맞추다', '눈에 불을 켜다', '눈 깜짝할 사이' 등등... 아무래도 보는 것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그만큼 관련된 말들도 많을 것이다. 나도 눈과 관련된 말 중, 아주 좋아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안중인 (眼中人)'이 그 단어인데, 꽤 예전부터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상이 자주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연애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안중인은 언제나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마저도 이제는 과거가 되었으나, 어찌 되었든...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무의식 중에 항상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딱히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평소 행실에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는 행동을 자주 하게 된다. 특히, '혹시나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각의 기저에 은연하게 깔려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타인의 - 정확히는 학습자의 - 나에 대한 평가가 항상 따라붙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은, 막상 수업을 하고 있을 때는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특히 그런 행동을 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벌어지게 된다.
'나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걸까?'
'그건 어떤 사이냐에 따라 늘 달라지는 것 같아.'
'대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때는 안절부절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
'그렇지. 착하고 선한 사람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어 하지. 혹은 도움이 되는 사람, 의지가 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
'특별히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사람을 동경했기 때문에? 아니면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게 봐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마 가장 마지막 말이 답이 아닐까 생각되네.'
'그렇지. 단순한 친구 사이를 넘어선 무언가가 되고 싶을 때의 나는 항상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뭐든지 일단 해 주려고 하는 것 같아.'
'문제는 그다음이란 건데...'
그렇게 한 번 신뢰를 얻게 되고 난 다음부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긴장의 끈을 놓게 되는 시점을 벗어나서부터는 이전과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어떤 부담감 같은 것들을 내려놓게 되어서 그런 걸까? 학창 시절부터 늘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착한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부던한 노력을, 나름의 무언가를, 그것이 꼭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우선은 힘든 내색 없이 그렇게 행동하곤 한다. 그러고는 일정 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반대로 그 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도 바라는 듯 되려 응석을 부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남의 눈치를 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이젠 눈치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내가 사람을 대할 때의 행동들이 그대로 남들에게도 완전히 동일하게 투영되는 것 같다. 한 번 마음에 든 사람은 아무리 미운짓을 해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부분만을 곱씹어서 생각하려 하고, 반대로 한 번이라도 미운털이 박힌 사람에겐 어떤 좋은 일이 있어도 한 번 꼬아서 보게 되는 그런 행동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튼 잘 보이려고 어떤 행동이라도 취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결말은 후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누군가의 눈에 밟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항상 도움이 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 강사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흘러가는 이야기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강사님들은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은 못 얻는 게 있으시잖습니까?"
"그게 뭐죠?"
"존경이요. 존경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고마워하는 마음, 감사함. 단순히 그냥 고맙다는 마음을 넘어선 그 어떤 무언가요."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강사가 된 것이었을까?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뭔가 핀트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강사란,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늘 생각나는 사람' 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강사로서 지내오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내 눈에 밟히고 지속적으로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런 사림이 되길 원하고 있는 듯하다. 확실하게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메타인지가 부족하군.
아무튼, '눈에 밟히는 사람', '그리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눈 밖에 나지는 않아야' 할 텐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나라는 존재가 혹여나 '안중지정'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그런 나에게 '눈엣가시'란 말은 너무나도 잔인한 단어로만 느껴진다.
눈에 가시라니... 얼마나 싫었으면...
살갗에 살짝만 찔려도 거슬리고 아프고 짜증 나는 것이 가시에 찔리는 것일 텐데 하물며 눈에 가시라니... 애지 간한 원수가 아니고서야 쓰지 않을 단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있을 것이다. 나를 눈엣가시로 여길 사람이. 그게 내가 그리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거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내 머리가 그런 걸 누굴 탓하겠는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정도면 애초에 본인이 그만큼 큰 잘못을 했다는 것 아냐?"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말로 듣지 않으면 모르겠는걸.'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사람 마음이지 않을까? '이미 눈 밖으로 난 사람',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라면 '눈치껏' 알아서 잘하길 바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내오면서도 여전히 그런 '눈치'는 전혀 길러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눈치가 없는 척,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앓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것 없는데 말이지.'
'산에 올라가서 소리쳐도 들리는 건 메아리뿐인 데, 안녕이라고 소리치면 안녕이라고 메아리가 돌아오잖아? 그 메아리만 들어도 아무튼 난 누군가의 인사를 받은 거야.라고 생각하고 지내는 것 같아.'
'내가 안녕, 이라고 해주길 바라니?'
'그건 매일매일 그렇게 하고 있는 걸. 이제는 메아리 말고, 다른 사람의 안녕이 듣고 싶어.'
'그 사람이 널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면?'
'그럼... 조금 슬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