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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하러 가는 날

내가 내 머리 하러 간다는데 꼭 날이 좋아야 가는 거야?

by brwitter

미용실을 예약했다. 펌 해야지, 해야지라며 미루고 미루던 예약을 드디어 했다. 물론, 그 마저도 미용실 방문 하루 전 일과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예약했다. 컷밖에 안 하던 고객이지만 친절히 응대해 주시던 실장님께 예약을 하려고 하니 시간은 한 타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타임이라도 남은 게 어디야?' 주말인데 시간은 내가 맞추면 그만이지. 언제나 그렇듯 딱히 계획적이지 않은 예약을 진행하며 오늘을 고대했다.


그리고 당일, 예약시간에 맞춰 나가려고 하자, 여기가 한국인지 아마존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들며, 친구들에게 "드디어 머리 하러 갑니다~" 카톡을 보내자 돌아오는 답장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날씨에?' 라며 놀랜다. 흠... 머리 하러 가는데 날씨가 영향을 미치는 걸까?


때로는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 집에 에어컨이 아직 없던 시절 선풍기와 부채에 연연하며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씨라는 핑계를 대어 본 적은 있다. 부산에 살고 있다 보니 습하지 않은 날을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이던 시절 꽤나 쓸만한 핑계였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지. 집에서 차까지 이동하는 그 잠깐의 순간만 제외하면 언제 어디서든 시원한 에어컨이 우리를 반겨준다.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도 적절한 핑곗거리를 찾기가 힘들다. "이 날씨에?"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비가 많이 오니, 날이 습하고, 날이 습하니 머리가 무겁게 축축 처진다. 펌을 하러 가는 길이니 그 습한 정도가 머리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글쎄, 이것도 딱히 답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답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동갑인 실장님과 알고 지낸 지 어느새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미용실에선 말 한마디 안 하던 나도, 머리를 하는 내내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고, 자연스레 날씨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일 년 내내 머리를 만지는 실장님이시니 "이 날씨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명쾌하게 내주었다.


"비 오는데 굳이 미용실까지 가려고 하나? 그냥 예약을 취소하고 다음에 가는 거 아냐? 넌 차가 있으니까 편하게 왔지, 보통은 버스 타랴, 택시 타랴, 걸어가다 비 맞느니 안 오지. 뭐 중요한 거라고. 오늘도 나 예약 3개는 취소 됐어."

"아..."


'익숙해져 무뎌지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고작 며칠 전에 정리해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비단 사람과의 관계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자연스레 '나의 것'이고, '언제나 곁에 있는 것' 들에 대한 무의식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나와 다른 상황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솔직히 좀 놀랐는데? 취소를 안 하길래 까먹은 줄 알았는데 왔네?"

"아... 뭐 중요한 거라고 취소까지 하겠어. 어차피 차가 오는 건데."

"오, 취소 안 했다고 고마워할랬는데, 차한테 고마워해야겠네. 사람 머리는 만질 줄 알아도 차는 닦을 줄 모르는데 비 개면 네가 대신 닦아줘라."

"그럼 고마운 마음으로 차 닦을 테니 오늘 머리 값은 안 받는 걸로?"

"계산은 이쪽입니다."


장마가 개거든, 날 좋을 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겠다. 묵묵히 나마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많이 아껴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

곁에 있어주는 모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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