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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24. 2023

S#2-6. 왕년엔 나도 '무서운 젊은 사람'이었다

케이블 채널에서 수주를 받은 TV 프로그램의 자막과 내레이션 번역을 발주하고, 번역문을 감수한 후에 전문 성우를 섭외해 내레이션 녹음을 하고, 회사 내 있는 기술팀 과장님과 자막 작업 및 종편을 진행해 납품하는 전반을 담당하는 일이 내 담당업무였다.


나와 같은 날 입사한 동료 직원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우리말 더빙을 위한 여러 일들을 담당했었다.


공교롭게도 '영화 일'과 관련 없는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 덕분이었는지 영화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할리우드 주간 뉴스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북미 박스오피스 순위와 신작 소개, 짤막한 인터뷰 등이 합쳐진 30분 남짓의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 외에도 슈퍼모델 TV 다큐라던가 여행 프로그램 등등 다양한 분야의 시리즈를 진행했었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0분짜리 프로그램의 납품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 '일머리'가 남달라서 그랬나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지 않고, 더 날카롭게 들이대자면 누구라도 금방 익혀서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그 업무에 대한 스스로의 긍지나 자부심 같은 건 별로 없었고, 조금씩 '영화 일'에 대한 미련 따위는 접어두고, 당시 발주처였던 케이블 채널 회사로 이직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입사하고 두서너 달 때쯤 지났을까. 업무는 거의 완전히 손에 익었고,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순조롭게 맡은 프로그램의 납품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녹음 파트의 실장님 두 분 중 한 분과 뭔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세세한 부분은 잊었지만, 업무도 손에 익고 내 머리가 커지기도 했을 것이고, 그 실장님의 지시 사항이 뭔가 마뜩잖았을 수도 있다.


하필 그 분과의 갈등이 고조된 그때, 외부에서 전문 성우 분이 녹음을 위해 회사로 오셨을 때였고, 부스와의 소통은 버튼을 눌러서 하기 때문에 버튼을 누르지 않고는 부스 안에서 바깥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말다툼 비슷한 상황이 밖에서 벌어지자 부스 안에 있는 성우 분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멈추지 못했던 다툼 끝에 겨우 녹음을 끝마치고 성우 분과 어색한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등뒤에서 그 실장님이 나를 불렀고, 이어진 말다툼 끝에 내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며 휙 등을 돌리고 나가버렸다. 자리에 돌아와 분을 삭이고 있는데, 앞서 점심 메뉴를 선택하셨던 다른 실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마도 그 사이에 두 분 사이에 대화가 있었던 듯싶었다. 그리고는 나이도 10살이나 어리고 경력도 짧은 신입사원인 내가,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잘못한 것이라면서, 당장 녹음실로 내려가 그분께 사과드리라고 종용했다.


마음속에 풍랑이 일었다. 사과 따위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집으로 가버리고 싶다. 내일부터 역삼동에 다시 오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잠시 생각을 했고, 여전히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분위기에 등 떠밀리다시피 해, 나는 다시 녹음실 실장님을 찾아가 여차저차해서 저차여차 했으니 제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죄송하다고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입으로만이었지만 어쨌든 사과를 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때 그 실장님이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겹쳐 올리고는 내게 말했다.


"이거 요즘 젊은 사람들 무서워서 같이 일하겠어?"



그때 나는 20대 중후반이었고, 그 실장님은 30대 중후반이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누가 잘못을 했는지 여부보다 그 장소에 있었던 (나를 포함한) 두 사람의 나이대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같이 일하기 무서운 '젊은 사람'이었고, 마흔도 되지 않았던 그 실장님은 그런 젊은 사람이 두려운 상사였던 것.


결국 그날에도 나는 그 회사를 관두지 않았다. 그날 나를 꾸짖었던 그 실장님과의 이후 어떤 사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십수 년이 지나, 첫 직장에서 알게 된 분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둘이 함께 아는 첫 직장 분들의 안부를 묻던 중, 그때 나와 다툼이 있었던 그 실장님이 채 60세도 되기 전에 등산을 가셨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날 일이 다시 떠올랐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말로는 백세시대 노래를 부르지만, 더 이상 평생직장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각박한 시대. 세상 어느 곳에 완벽한 직장이 있을까만은, 그럴 때 이런 직장 내 관계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영화가 <인턴 The Intern(201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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