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에서 탄현을 오가던 때,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초보운전자라 안전하게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요즘같이 스마트폰이 있던 시대가 아니다 보니, 그 긴 구간을 오갈 때엔 반드시 읽을거리를 준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주 열독하던 영화 전문 주간지《씨네 21》에 실린 구인 광고에 시선이 꽂혔다.
당시 알만한 흥행 성공작들을 제작한 영화 제작사 두 곳에서 기획실 직원을 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두 곳은 명필름과 우노필름이었다. 회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렜다. 저런 유명한 영화 제작사의 기획실이라는 곳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몸서리처지게 궁금했지만,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기에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펼칠 따름이었다.
드디어 내가 꿈꾸던 '영화 일'에 첫발을 내디딜 순간이 온 건가! 타고 있던 3호선 지하철이 마치 그 두 회사가 있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줄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그날 무슨 정신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온종일 머릿속에서는 명필름과 우노필름, 우노필름과 명필름 두 회사에 보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작성할지, 일단 작성을 한 다음 회사 이름을 헷갈리지 않게 구분해서 잘 보내야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두 회사에서 모두 나를 채용하면 어디로 가야 하지? 내적 설레발에 심신이 피곤해졌을 수도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단 이력서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작성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소중하게 다뤘던 구인 공고가 실린 《씨네 21》을 다시 펼쳤다. 그 순간, 그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문구가 보였다.
‘자격요건: 경력 1년 이상’
뚝! 방금 전까지 들뜬 마음에 머릿속에서 갖가지 상상과 설레발로 신난 상태에서, 팡파르라도 울리는 듯한 환청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는데,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경력 1년 이상' 이라니! 내게는 1년이 아니라 단 하루의 경력도 없었다. 하루는커녕 단 1시간의 경력도, 경력이라도 부를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라는 곳을 다녀본 적도 없고,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당시 다니던 방송 아카데미도 경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교육기관이었을 뿐이다.
그때부터 고민에 휩싸였다. 없는 경력을 거짓으로 꾸밀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당장이라도 경력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지원서를 내서 1년짜리 경력을 갖춘다면, 1년 후에 과연 두 회사의 기획실에 나를 위한 자리가 남아있을까.
그래도 그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참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마티 맥플라이를 미래로 데려갔던 드로리안에 내가 탄다면, 그래서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과감하게 두 회사에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을 것이다. 면접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해도, 그렇게 일단 저질렀다면 아마 후회가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이후에도 영화 제작사의 기획실에서 일할 기회는 내가 찾지도 않았고, 또 내게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만 남았을 뿐이다.
마침 명필름에서 제작한 영화 중에 로맨틱 코미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If the Sun Rises in the West(1998)>를 종종 다시 보는데, 볼 때마다 저 시기가 떠오른다. 어떤 때엔 확 저지르지 못한 당시 내 결단이 옳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정반대의 고통스럽기까지 한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이 영화는 줄리아 로버츠 Julia Roberts와 휴 그랜트 Hugh Grant 주연작 <노팅힐 Notting Hill(1999)>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톱스타와 평범한 남자의 로맨스라니! 현실에서 겪는 것이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그런 로맨스는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 일이기도 하지만,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의 임창정이든 <노팅힐(1999)>의 휴 그랜트든 비현실적 상황에서 적어도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다.
로맨스 영화로부터 얻어지는 결론치고는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일단 부딪혀는 보자! 해보지도 않은 일, 닥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자체적으로 결론짓지 말자!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