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2K니 밀레니엄이니, 1999에서 2000으로 연도가 바뀌면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오들오들 떨며 1999년 12월 31일 자정을 기다렸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제전에서 핑클이 등장해 '겨울 내내 너를 생각하며 만들던 빨간 스웨터도 입혀줄 거야'라고 달콤하게 속삭여도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여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쿵쾅 우르르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릴 텐데...
드디어 그때가 왔다. 보신각에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생중계로 시작된 카운트다운. 10, 9, 8,... 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2n 년이라는 시간은 인생의 다양한 면면을 체험하기에 너무도 짧은 시간인데, 2000으로 숫자가 바뀌는 순간 컴퓨터부터 폭발하려나....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V 속 진행자의 외침과 함께 무너져 내릴 줄 알았던 세상은 2000년을 맞이했다.
가수 민해경이 1980년대 초에 발표한 노래 "서기 2000년"에서 '서기 2000년이 오면 모두가 즐거운 세상, 그때는 로켓 타고 멀리 하늘을 수놓으리'라고 말했던 그 2000년이 이렇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불쑥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 처음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되었다. 2000년 1월 3일, 밀레니엄을 맞이한 첫 번째 월요일에 설레는 건지 떨리는 건지 구분하지도 못한 채 광역버스를 타고 역삼동으로 향했다. 사실 20여 년도 더 지난 일이라 생애 첫 출근날 아침의 감정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첫 출근날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은 방금 전 일처럼 생생하다, 그 생경스러움과 당황스러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인생에 전혀 상관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의 상사가 되고 선배가 되었다. 경력 제로의 초신입사원이었기에 후배는 당연히 있었을 리 없지만, 나와 같은 날 출근한 동료 직원은 나보다 한 살인가 어렸었다. 한 살 어리다고 해서 내가 무슨 선배 노릇을 할 건 아니었다. 어차피 각자 맡은 직무 자체가 달랐으니까.
어쨌든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냈든 간에 점심시간이 다가왔고, 열 명 안팎의 작은 규모의 조직이었던 내 첫 직장에서 첫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메뉴 선택? 태어나 처음 가본 동네인 데다 내가 첫 출근날부터 점심 메뉴를 들이댈 만큼 배포도 없었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높으신 분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 메뉴는 콩나물국밥이었다.
콩나물국밥이라... 뭔가 특별한 다른 메뉴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태어나 처음 발을 디딘 회사라는 곳에서,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분주하게 오가는 역삼동 인근에서 '나도 이제 직장인이구나! 사회인이야!'를 되뇌며 먹게 될 생애 첫 점심 메뉴로 콩나물국밥을 원했을 리는 없다. 평소에 전혀 선호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날 먹었던 콩나물국밥 맛이 딱히 인상적이었을 리 없다. 그냥 콩나물국밥 맛이었겠지. 문제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였다. 국밥 한 그릇에 6,000원인가 했었는데, 다들 지갑에서 돈을 주섬주섬 꺼내 사장님 다음으로 높으셨던 실장님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신입사원의 첫 출근날 점심 값은 어떻게 하는 걸까. 각자 경력은 제각각일 테지만, 나보다 10살은 더 먹은 상사들이 6,000원 정도는 호기롭게 내주는 건가. 잠시 내적 갈등을 하며, 지갑 속에 있던 만원 짜리 지폐를 만지작대고 있던 그때, 그 실장님이 내게 물었다. 돈 안 주냐고.
순간, 나는 생전 떨어본 적도 없는 너스레를 동원해, "하하하, 아 저는 신입사원 첫 출근날이라 선배님들이 첫 점심은 사주시는 줄 알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슨 소리하는 거냐며 얼른 돈을 달라던 그 차가운 한마디. 아, 이것이 치열한 정글과도 같은 사회생활의 단면인가 보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었고, 시간이 한참 지난 요즘에도 그날의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출근날 막바로 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두드려 보지도 않았던 영화 제작사의 문이 아른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였는지, 지난 세기말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 두 편이 마침 그때 문조차 두드리지 않았던 두 회사가 제작한 영화들이었기에, 혼자만의 애틋함이 더욱 커져갔던 시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