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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22. 2023

S#2-7. 예스맨이 되지 못한 신입사원

생애 첫 직장이었지만 결국 반년 남짓 다닌 그 회사에서 나는 '예스맨'이 되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신입사원 주제에 물통정수기 갈아 끼우라는 상사의 지시에 불복한 맹랑한 조대리 사건' 정도로 이름 붙일 수 있다.


거의 20리터쯤 되는 무거운 물통을 거꾸로 끼워 냉온수를 받아마시는 정수기가 있었는데,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 그 정수기를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그 정수기를 외면한 심리 안쪽에는, 물통 안의 물이 언젠가 바닥을 치면 왠지 모르게 나에게 새 물통을 갈아 끼우라고 시킬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래서인지 목이 마르면 아예 근처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면 마셨지, 그 정수기는 거들떠도 안 보며 버티던 어느 날이었다.



7~8살 정도 연상인 회사 과장 분이 나를 부르더니 정수기에 물통을 새로 끼워 넣으라 지시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그 지시를 거부했다. 그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입사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생짜 신입이 감히 과장의 지시를 거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정수기 물통을 갈아 끼울 수 없는 이유를 댔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저 정수기의 물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 과장 분은 내가 갈아 끼워야 하는 이유를 대며 응수했다. 내가 신입사원이기 때문에 갈아 끼워야 한다는 것.


당장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였다. 나는 끝까지 거부하려 했지만, 그 위에 실장님이 등장하셔서 내가 그 물통을 갈아 끼우는 것으로 결론지었고, (속으로) 씩씩거리며 20리터짜리 무거운 물통을 꾸역꾸역 들어 올려 주둥이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거꾸로 들어 정수기에 꽂으려던 찰나, 거대하고 무거운 물통이 삐끗하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마도 주둥이에 뚜껑을 열고서 정수기에 거꾸로 꽂는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모로 누운 물통에서는 다행히 물이 콸콸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바닥이 다소 흥건해질 정도로는 물이 흘렀다.


결국 같은 층 공간을 나눠 쓰던 다른 회사 직원들이 와서 사태를 수습하며 물통을 제대로 꽂았고,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정수기 물통을 갈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퇴사하는 날까지 그 정수기의 물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때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자책하는 의미가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이런저런 지시에 대해 자신이 아무리 부당하다 느끼더라도 그에 대해 반박하는 일 자체가 과연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인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예스'만을 외치며 납작 엎드려 조아리는 것이 조직에서 당장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회사에서 원하는 바람직한 인재상이라며 명예의 전당에라도 올려줄 그런 조직이 세상에 있겠나 싶다.


물론 대부분의 상사들은 '예스'만을 외치는 그런 조직원들이 자기 입맛에 맞다며 선호하기는 하겠지. 아무튼 그때 그 사건은 이후에 내가 무조건적인 '예스맨'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신입사원의 패기 따위는 어딘가 숨겨두고 싫어도 좋은 척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게 해 주었다.



사실 물통이 바닥에 미끄러진 순간, 내게 최초로 지시를 내린 그 과장 분이 현장을 보고 지었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예스맨이 답인가, 짐 캐리 Jim Carrey의 고군분투를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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