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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04. 2023

S#3-2.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여권 사진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의전의 세계

영화사 조대리가 된 지 1년 여가 지났을 때, 당시 회사에서 수입했던 외화 중 가장 높은 수입가를 기록했던 창사 이래 최대작인 <디 아더스 The Others(2001)>의 개봉을 위한 여러 일들이 발 빠르게 준비되던 중이었다.


한국계 미국 프로듀서인 박선민 PD와 연출을 맡은 스페인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Alejandro Amenábar가 영화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고, 2~3일 정도 짧은 일정 동안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은주 배우가 깜짝 방문한 시사 등 행사가 별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치고 출국하는 박 PD와 아메나바르 감독을 배웅하기 위해, 당시 같은 팀이었던 동갑내기 대리 C와 외화 구매 담당이었던 N과 함께 인천국제공항까지 함께 이동했다. 보딩패스를 받고 짐을 부친 두 사람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우리는 뒤돌아섰다.



그러다 공항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N의 휴대전화가 울렸고 잠시 후, 작별 인사를 나눴던 두 사람이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알고 보니, 칠레와 스페인 두 나라 국적자인 아메나바르 감독이 스페인 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하필 여권 유효기간이 한국에 있는 동안 이미 끝나버린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방금 전에 'bye'를 했던 우리는 다시 쑥스럽게 'hi' 인사를 나누고는, 일단 C와 N은 박 PD와 부쳤던 짐가방을 챙기기 위해 공항에 남기로 했고, 내가 아메나바르 감독을 데리고 일단 주한 스페인대사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예기치 못한 비용 발생에 관해서는 회사의 허락을 받고, 모범택시에 탑승한 나와 아메나바르 감독은 한남동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으로 향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에 당황하기는 감독도 나도 마찬가지였고, 갑자기 서울을 향해 되돌아가는 택시 안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한국에 와있던 동안, 차질 없는 행사 진행이 우선이었기에 딱히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지만, 갑자기 발생한 상황 속에서 당황한 마음을 진정하고 보니,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25세에 데뷔작 <오픈 유어 아이즈 (Abre los ojos) Open Your Eyes(1997)>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천재감독이라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이기는 했지만, 마침 내가 다니던 회사가 <오픈 유어 아이즈(1997)>를 수입해서 우리나라에 소개하기도 했었고, <디 아더스(2001)>의 제작에도 참여한 톰 크루즈 Tom Cruise가 주연한 <바닐라 스카이 Vanilla Sky(2001)>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 차창밖으로 마침 63 빌딩의 모습이 보이길래, 침묵을 깨고 한 마디 건넸다.


"저 건물이 63 빌딩이라는 건데, 한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야."


맙소사! 아니, 아뿔싸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시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택시 기사님에게 스페인 대사관 도착 직전 인근에 있는 사진관에 먼저 들르겠다고 말했고, 마침 거의 즉석 사진에 가깝게 촬영 후 곧바로 새 여권 사진을 받아 들었다. 잠시 후, 스페인 대사관에 도착하니 당시 영사 분이 거의 버선발로 입구까지 달려 나와 엄청난 국빈을 맞이하는 듯 기쁘게 아메나바르 감독을 반겼다.


안 그래도 스페인의 천재 감독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었다며,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고, 감독과 영사는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후, 임시여권을 발급받은 아메나바르 감독을 다시 만나, 그사이 박 PD와 동료들이 짐을 정리하고 체크인했다는 호텔로 향했다.


호텔 앞에서 이번엔 진짜로 작별 인사를 나누며, 아메나바르 감독은 내게 여권 사진 한 장을 내밀며, 그날 있었던 돌발상황에 대해 사과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기는 했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렇게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니까. 덕분에 나는 스페인의 천재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한국에서 찍은 여권 사진 한 장을 가진 유일한 한국 사람이 되었다.



아메나바르 감독의 한국 방문에 따른 홍보 효과는 물론, 영화 자체가 워낙 완성도 높고 재미있었기에, 2002년 1월 11일 개봉한 <디 아더스(2001)>는 당시 전국 관객수 170여만 명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영화의 한국 개봉에 뭔가 작은 역할이라도 했다는 생각에, 영화사 조대리로 사는 일이 어쩌면 앞으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때였다.




77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 당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출처-구글 이미지)

몇 년 후, <디 아더스(2001)>에 이은 차기작 <씨 인사이드(Mar adentro) The Sea Inside(2004)>가 2005년 77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국제 장편영화상)을 받는 아메나바르 감독을 보며, 마치 나랑 친한 지인 내지는 친구가 오스카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었고, 그로부터 3년 전 여권 사진까지 건네받을 정도로(!) 반나절 붙어 다니며 안면을 텄던 아메나바르 감독과의 해프닝을 들은 회사 누나 S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앞으로 '킵 인 터치'를 하기로 했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던가..."


아, 그때 여권사진 뒤에 이메일 주소라도 적어달라고 할걸, 그랬으면 아카데미상 수상 축하 메일이라도 보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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