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을 거쳐, 두 번째 직장이자 첫 번째 영화사를 거쳐, 영화제 두 번의 경력을 쌓는 동안,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다 영화 쪽에서 일하는 또래 친구들과 그날도 여지없이 모여 놀던 중, 당시 친구 H가 '문화를 가장 잘한다는 그 기업의 계열사였던 C 회사에 전화를 걸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다들 박장대소가 터졌다.
'OOO 씨'를 바뀌 달라는 친구의 말에 전화를 받은 사람이 '아, OOO님이요? 잠시만요. OOO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요.'라고 하더란다. 나를 비롯해 다들 정말 '님'이라고 부르더냐며, 너무 이상하다고 설마 실제로 그렇게 부를까 싶다며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후, C 회사에서 투자배급한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를 극장에서 보러 간 날이었다. 마침 엔드 크레디트를 끝까지 보게 되었는데, 수십 수백 명의 이름 가운데 내가 아는 이름이 하나 눈에 띄었다. 아마도 초등학교부터 동창이었을 고등학교 동창 J의 이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J의 근황을 알지 못했지만 막연하게 어딘가 대기업에 취직했을 것만 같았지만, 그 대기업이 영화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기억 속에 우등생의 대명사처럼 각인된 J가 영화 투자일을 하다니. 그날 이후 C 회사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더욱 높아졌다.
사람 앞 일은 알 수 없다고, 그날 이후 1년 반이 훨씬 지났을 무렵, C 회사에 이력서를 낼 기회가 왔다. 어린이영화제가 마무리될 즈음이었고, 두어 번 면접을 보게 되었다. 몇 번 되지 않지만 면접에서 당했던 고통과 수모가 떠올라 몹시 긴장했지만, 다행히 전에 겪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거의 최종인 듯했던 당시 C 회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분 중 한 분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 첫 번째 질문이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또 마침 C 회사에서 투자배급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이 그때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치 면접에 철저한 준비를 위해 그 회사에서 투자배급한 모든 영화를 다 미리 본 듯이(물론 이전에 개봉한 그 회사 영화들을 거의 다 보긴 했었다).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후 방에서 나오자, 인사팀 담당자가 나를 배웅하면서 최종 결과는 곧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왕래가 없었던 J가 다니고 있던 C 회사에 내 자리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기에, 친절한 웃음으로 나를 배웅하는 당시 인사팀 담당자와 다시 만날 일이 없다 해도 크게 서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24층인가 26층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가 1층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1층에 아직 도착도 하기 전, 전화가 왔다. 방금 헤어진 인사팀 담당자였다. 마침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말을 전했다.
몇 년 전, '님'이라 부르는 호칭문화가 손발 오그라든다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던, 고등학교 때 내게는 우등생의 대명사처럼 각인된 J가 다니는 C 회사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돌발상황 속에서 내적 고요를 추구했던 나였지만 흥분되고 신나는 일이었다.
첫 출근을 하면서 내심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당시 기준으로 4년 여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사회생활에 '제2장'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뭔가 내적으로 외적으로 '이미지 세탁'을 하고 싶었다. 호불호를 드러내는 표정 관리부터, 아예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 싶었다. 어차피 J를 제외하면 그 회사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한국영화 해외배급은 내가 직접적으로 해본 일은 아니었다. 나의 첫 영화사 직장에 해외부서가 있었으나, 나는 그 부서에 속한 적은 없었고 그저 곁눈으로 흘깃 본 정도였으니 처음 하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몇 살 어리지만 관련 경력으로는 선배인 동료들과 한 팀이 되었고, 그들은 지레 겁먹었던 텃새는커녕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어 기대보다 빠르게 팀과 회사에 적응해 나갔다.
당시 팀의 시스템은 세일즈와 마케팅으로 나누었고, 마케팅에 속한 3명이 당시 라인업을 두고 각자 담당하는 영화를 맡는 식이었다. 그 시작은 영화 <왕의 남자(2005)>부터였다.
내가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서 J의 이름을 보고 놀라웠던 것처럼, 그 회사에서 투자배급하는 영화들의 엔드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포함되기 시작했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는데 네 이름이 있더라'는 주변의 증언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무언가 동경하고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면, 그것에 취해 잠시 동경하고 바라던 때의 간절함을 잊게 된다. 내 이름 석자를 발견했다며 기쁘게 말해주던 주변의 말들이 익숙해지다 보니, 그 자체로 인한 감흥도 점점 사그라들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그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인가 싶다.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임원 면접의 치트키처럼 작동했던 영화를 다시 보는 일도 나름의 풋풋한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