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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17. 2023

S#3-5. "넌 좋겠다, 좋아하는 영화 일 해서"

'아이 러브 스쿨' 열풍이 불면서, 졸업 후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동창들 몇몇과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가지던 때가 있었다. 다들 사회초년생 시절이었고, 나는 마침 두 번째 직장이자 첫 번째 영화사로 이직한 즈음이었다. 각자의 재능과 능력과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직업군에서 첫발을 내디딘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각자 기억하는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꺼내고 또 꺼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유명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는 Z가 모임에 등장했고, 여타 다른 직군과 다르게 초봉부터 억! 소리 나게 높다는 점부터, 높은 연봉을 받는 대신 새벽별 보며 퇴근해야 한다는 등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렇게 괴롭고 피곤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Z는 자신의 첫 직장에 꽤나 자긍심을 가지고 있나 싶었다.


그날 Z가 말했던가, 아니면 은행 쪽으로 취업한 다른 친구가 말했던가, 아무튼 나는 영화사에서 영화 일을 한다고 했더니 단박에 "넌 좋겠다. 어릴 때부터 영화 좋아하더니, 좋아하는 일 하고 있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고, 나도 딱히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문화를 제일 잘하는 기업'의 계열사인 영화사 C는 1990년대 중후반을 지나 2000년대 초중반, 아직도 건재한 영화전문주간지《씨네 21》에서 매년 영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충무로 파워 50'에서 당시 대표이사가 늘 1~2위에 꼽혔고, 1990년대 중후반 대기업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국내 최대 메이저 스튜디오로 터를 잡았다.


업계 1위로 꼽히는 회사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회사의 녹을 먹고사는 조직원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고, 회사 밖에서 명함을 내밀 때마다 뿌듯함을 주기도 했다. 예전 대표이사셨던 K 대표님의 인터뷰 기사에서 봤던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 회사에 대한 자긍심이 자칫 자만심으로 비칠 수가 있다면서, 회사와 나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말라는 직원들에 대한 당부였다. 회사의 힘은 회사의 자본으로부터 비롯될 텐데, 그 자본이라는 것이 직원 개개인의 소유는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사회 경험으로 치면 신인급이었던 나는 C 회사의 자본이 투입되어 제작된 한국 영화의 해외 배급을 맡은 부서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영화 한 편 한 편이 모여 형성되는 막강한 라인업과 나를 동일시했던 때였다. 2월 베를린, 3월 홍콩, 5월 칸, 10월 부산, 11월 미국 AFM 등 홍콩 마켓을 제외하면 해마다 열리는 주요 영화 마켓에 C 회사의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회사와 내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애사심에 불타올랐던 때도 있었다.



내가 갓 입사했을 때 나와 같은 업무를 맡았던 D는 다다음 해 이직을 했고, 그리고 다시 2년 후에는 L이 직무 순환의 일환으로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입사 5년 차가 되었을 때 나도 직무 순환 대상자가 되었다. 당시엔 직급도 낮았고 나이도 어렸던 편인 데다 회사에서 정한 직무 순환 대상자이니, 아무 부서나 다 받아줄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아무튼 희망하는 부서가 있다면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은 꽤 컸던 때였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한국 영화 해외 배급 일을 좀 더 하는 것이었다. 당시 예정 라인업, 다가올 국제 영화제와 마켓 준비와 참가 등, 아직 더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았다.


물론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자신이 하지 않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나도 마찬가지.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이렇다는 식의 결과론적 판단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때는 그때대로 그러고 싶었으니 그랬겠지. 


결과적으로 나의 30대는 그렇게 머리와는 다르게 회사, 혹은 회사에서 투자한 영화들과 나의 존재감을 동일시하며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지만 즐겁게, 술도 많이 마시면서 그렇게 흘러갔다.



어떤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감상은 그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 접어두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관련된 어떤 일을 하건, 어쨌든 내가 받은 월급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하니까.


이제 다시 영화가 '취미'로 돌아온 이후, 예전에 관련됐던 영화들을 다시 보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다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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