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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Sep 20. 2023

S#3-7. 발로 쓴 시나리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 5일 내내 사무실로 출근하고, 21일이 되면 월급이 따박따박 내 통장으로 들어오던 '월급요정'의 생활이 끝나자, 내게는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먼저 밀려왔다. 시키는 일을 해야 하니 만들어야 했던 파워포인트의 그 쓸데없는 장표를 꾸미느라 고심할 필요도 없었고, 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칠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자. 대신 돈이 되는 일을 해보자. 그래야 의욕도 즐거움도 보람도 있을 테니까.



친한 친구부터 어쩌다 연락을 주고받는 지인들까지, 일단 자유의 몸이 된 자에게 묻는 질문은 거의 비슷하다. 


"뭐 하고 지내?"


월급요정에게는 저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할 테니까.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회사 일'을 한다고 할 테니까 굳이 물을 필요가 없겠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개인의 자존감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고 울부짖지만, 어쩌면 그게 개인의 자존감 그 자체였나.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가시가 뾰족 솟아나곤 했다.



그래, 이제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자. 


"조 대리는 영화를 많이 봤으니, 시나리오를 잘 쓸 것 같아."

시작은 그랬다.


일단 제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나의 특성상, 엘리펀트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호그와트 세계관을 창조했다는 J.K. 롤링이 먼저 떠올랐고, 마침 맥북을 쓰고 있었기에 첫 번째 조건은 충족! 그다음은 나만의 엘리펀트 카페인 집 근처 스타벅스 지점을 찾아갔다.


출퇴근을 하지 않는다고 늦잠을 자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시간부터 뭔가 매일매일 실천하는 루틴을 만들어 실천하며 나만의 업적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스타벅스 지점에서 맥북으로 시나리오 쓰기'가 시작됐다.


그날 이후부터는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대체 목적이 실제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영상화를 원하는 건지, 내 근황을 묻는 이들에게 던질 대답 거리를 마련한다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나도 헷갈렸다.



예전에 극장에서 어느 영화가 끝나고 퇴장로로 나오는데, 뒤편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명이 방금 본 영화가 너무 재미없었다며,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발로 쓴 것 같다고 하자, 다른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네가 직접 써봐, 시나리오."

처음 시작은 나도 그런 생각이었다. MBC 드라마 <인어 아가씨>의 주인공 은아리영이 피고름을 짜내가며 썼다던 드라마 대본처럼 나도 피고름을 짤 기세로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살면서 본 수천 편의 영화들이 모두 영감의 대상이었고, 누군가 추천해 준 시나리오 작법서 하나를 읽으며 구조 짜기에도 도전했다.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재미없다를 말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다. 재미란 내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니까.


하지만 실제 시나리오를 써보니, 다른 사람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기승전결이 제대로 짜이고 정신 제대로 박힌 캐릭터들이 이런저런 대사를 쏟아내도록 설정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없더라.


초반 설정이 떠올라 구조를 짜기 시작하다 보면,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 어디선가 봤던 내용인 것 같고, 어떤 캐릭터가 떠올라 어떤 대사를 입히자니, 이 또한 왠지 귀에 익은 것 같았다.



그렇게 반년 정도 걸려서 초고가 나왔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이걸 나 아닌 누군가가 읽어보고 그에 대한 신랄한 피드백을 줬으면 좋겠는데, 달콤한 칭찬은 귓가를 간지럽히며 기분 좋게 하지만 조금이라도 쓴소리를 한다 치면 듣기가 싫은 게다.


단 소리든 쓴소리든 100장이나 되는 긴 글을 읽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어렵지만, 그 이후에 어떤 피드백을 들을지 두려운 것도 일이더라. 반대로 누군가 내게 시나리오를 읽고 피드백을 요청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부담감을 내가 상대에게 입히게 되었으니, 이른바 '내로남불'에서 자유롭지 못한 터.


어느 자리에서 뵀던 한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기저기 모니터링을 부탁하는 일이 바람직하지는 않다며, 어떤 내용의 시나리오든 누군가 그것을 그다음 단계로 이끌어줄 결정권자 단 한 명의 마음에만 들면 성공이라고.


그 한 사람을 찾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선은 언젠가 이후 수정을 멈추고 처박아둔, 발로 쓴 내 첫 번째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야겠다. 오랜만에 맥북을 들고 집 근처 스타벅스를 찾아갈까 싶다.



창작자의 고통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시나리오를 발로 써보니 그 느낌을 아주 살짝 알게 되었다. 논픽션 책을 각색하던 찰리 카우프만이 도저히 사건이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던 영화 <어댑테이션 Adaptaion.(2002)>을 보며 새로운 영감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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