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ULD(N'T) HAVE P.P.'의 끝없는 반복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卒業) The Graduate(1967)>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 로빈슨 부인과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벗어나, 로빈슨 부인의 딸 일레인과의 진정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결혼식장에 들이닥친 벤자민이 웨딩드레스 차림의 일레인의 손을 잡고 뛰쳐나온다.
헐레벌떡 달아난 두 사람은 버스에 올라타 맨 뒷자리에 앉는다. 당장은 헤어질 위기에서 벗어나 금세 세기의 사랑이라도 이룬 듯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곧 정면을 응시하는 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한 듯한 무표정으로 영화는 끝난다.
우리말로 똑 떨어지는 표현이 없지만, 영어로는 10년을 묶어 세는 단위인 'decade'가 있다. 그 식으로 치면 꼬박 'two decades', 즉 20년 동안 어딘가 소속된 월급요정으로서의 인생을 살다가, 이제는 어디에도 시간 맞춰 출근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입맛에 맞춰진 ppt 장표를 꾸미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삶을 맞이했다. 정해진 날짜에 맞춰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급이 없어진 것은 자유와 맞바꾼 대가려니 했다.
처음에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1994)>에서 손망치가 닳아빠질 정도로 벽을 파고 또 파 탈옥에 성공한 앤디가 감옥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던 장면에서 받은 감동스러운 순간이 내게도 온 것이라 기쁘기도 했고, '도비는 이제 자유'라며 의기양양해하던 집요정 도비에 나를 대입시키기도 했다.
어릴 때 배웠던 영어 문법 가운데, "should(n't) have p.p.(과거분사)"는 "~~ 을 했어야 했다" 혹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도의 뜻으로, 월급요정 시기뿐 아니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인생의 어떤 순간들이 떠오를 때마다 저 표현이 떠올라, 나 혼자 정하기로는 그런 순간들을 "should(n't) have p.p. moment"라 한다.
중 2 때, 아직도 이름과 얼굴이 생생한, 늙수그레했던 수학 선생이 수업 중에 우리 반 전원에게 팬티만 남기고 위아래 교복을 다 벗은 채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으라는, 일종의 단체 기합을 줬을 때, 어차피 다 같이 거의 발가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좌우 친구들과 수치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그 선생에 대한 증오의 표현으로 즉각 수학을 포기하면서, 요즘 말로 치면 '수포자'가 되었는데, "나는 그때 수학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학 2학년 때, 딱히 친하지는 않았고 지금 이름도 얼굴도 가물거리는 어떤 동기 하나가 1학년 동안 학 교를 다니면서 재수를 해서 자신이 원하던 전공과 학교의 신입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충격에 빠졌었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였던 나는 어찌어찌하다가 2 지망 학과에 합격을 하면서, 어딘가 둥지를 틀면 금세 안일하게 퍼져버리는 습성을 유지한 채, 1학년 때 죽이 맞아 틈만 나면 노닥거리던 동기 G와 새롭게 바뀌는 수능을 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그리고 남몰래 수능을 준비해 재수에 성공한 그 동기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일기만 했다. 그때 뭐가 어찌 됐든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무언가 행동에 옮겼어야 했다."
생애 첫 직장에 입사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엄연히 입사일자가 나보다는 늦으니 동기라고 둘러치기에는 애매하고, 후배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데다, 심지어 나보다 두서너 살 위인 사람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내 성격이 호방해서 금세 '형동생'을 맺으며 옹기종기 지냈으면 좋았겠지만, 내 속엔 송사리만 한 좀팽이가 수만 마리 서식하기에, 나는 그에게 일단 경계심부터 품었다. 그러다 신입사원 환영 회식 자리에서 자신의 여자친구 별명이 곰돌이 푸라는 둥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하는 그에게 "제가 지금 그 얘기를 왜 듣고 있어야 되냐"며 면박을 줬다. 나는 그때 "그런 싹수없는 말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제 계약직으로 일할 때, 나중에 알게 된 행정 착오로 인해 그해 추석명절 직원들에게 배포한 스팸 세트를 못 받았던 그때, 나는 어느 날 오전 출근길에 욱하는 마음이 솟아올라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삼선 슬리퍼를 포함한 소지품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부랴부랴 뛰쳐나왔었다. 그때는 그 조직이 우습고 하찮기도 했고, 당장 내가 뭘 어떻게 바꿀 수도 없어 보였기에 그냥 갈등을 피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때 누군가 책임자와 정식으로 면담을 통해 하소연이 됐든 심경토로가 됐든 "대화를 시도했어야 했다."
C 회사를 다닐 때, 어느 순간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는, 내 발 위에 올라서기 위해 이 회사에 온 것이 아니라고 앵무새처럼 말하면서도, 뒤에서 온갖 권모술수를 부렸던 그에게도 마찬가지다. 포커 게임을 할 때도 좋은 패가 손에 들어오면 금세 표정에 드러나, 죽었다 깨나도 포커페이스는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겉으로는 싫은 감정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
나만의 "should(n't) have p.p. moment"가 어디 저 정도밖에 없겠냐만은, '그때 만약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라며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그때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은 그다지 건설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과거의 시행착오를 돌이켜보고 혹시라도 미래에 비슷한 경우가 반드시 생기지 않더라도, 나의 생각체계를 가다듬을 계기는 된다.
벤자민과 일레인이 탔던 버스는 어딘가에 정차했을 테고, 둘은 버스에서 내렸을 것이다. 일단 결혼식장에서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둘에게 그 순간 이후 어떤 인생이 펼쳐졌는지는 영화의 속편이 나오지 않았기에 온전히 우리의 상상과 추측으로 만들어낸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만 남아있다.
당장 오늘 이후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껏 반복되어 온 "should(n't) have p.p. moment"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