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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24. 2024

한국영화 해외 수출 역군이라는 자부심 2

"한국영화 해외 배급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건가요?"

모나미 볼펜을 깔짝이던 모 회사 면접관이 조대리에게 물었다.



일단, '한국영화 해외배급' 일에 대한 오해 하나. 조대리의 지난 글에 등장했던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신입 사원 두 명의 엇갈린 운명(까지는 아니지만, 입사 초기 업무 분장이라고 해야 하나)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는가?


가장 큰 오해가 바로 그놈의 '슈트케이스 끌고 온 나라의 공항을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며, 한국어 이외의 외국어(라고는 하지만 주로 영어)로 그 나라의 배급업 종사자와 쏼라쏼라 소통하는 '근사한 그림'부터 떠올린다. 그 오해는 어떤 면에서는 맞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틀리거나 혹은 전부는 아니다.



조대리가 근무했던 C사의 경우, 대략 이런 프로세스를 거쳤다.


1) 자사의 연간 투자 배급 제작 라인업에 속해 있으면 거의 해외 배급도 계약에 포함된다. 개중엔 국내 극장과 부가판권 배급 대행과 해외 대행 배급 계약을 맺는 타사 투자 영화도 있을 수 있고, 국내 배급 대행만 맡아, 해외는 빠지는 경우도 있다.


2) 국내 개봉 일정 윤곽은 해당 영화의 완성 시점에 맞물리기 때문에, 일단은 그 일정에 맞춰서 연간 해외 필름 마켓에서 첫 선을 보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물론 감독의 해외 인지도, 이전 영화의 흥행 성적이나 수상 실적, 주연 배우가 해외에서도 유명한 경우, 제작비 규모가 큰 경우 등 영화마다 갖춘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나름의 전략을 세운다.


3) 대체적으로 해외 배급의 초기 윤곽을 잡을 때, 우선 그 영화를 해외에 알릴 '영어 제목'을 고심한다. 요즘은 해외 배급에 대한 관심이 전보다 훨씬 더 높지만, 조대리가 처음 일했던 당시에는 요즘과 비교해 관심도나 비중이 많이 적었기 때문에, 이른바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영어 제목을 해외팀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지만, 제작사나 감독 측에서 영어 제목을 먼저 고심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일단 팀 내에서 영화의 내용과 주제 등을 감안한 1차 안을 도출하고, 이를 투자팀을 통하거나 제작사와 직접 소통해, 1차 안에서 정하기도 하고, 역제안을 받아 가장 아름다운 제목으로 정한다.


영어 제목을 정할 때 암묵적인 룰이 하나 있었는데, 선정하는 영어 단어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해외 배급이 '영어권' 국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유럽이나 아시아 등 한국 외 전 세계를 일단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제목에 너무 고차원적인 단어를 쓰게 되면, 비영어권 바이어들에게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즉각 전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4) 그다음은 예고편과 본편에 영어 자막을 입히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예고편은 국내 마케팅을 위해 제작한 예고편에 대사와 한글 자막을 영어로 번역하는 소극적인 경우와 아예 해외를 겨냥해 새롭게 제작하는 적극적인 경우로 나뉜다.


포스터도 마찬가지. 국내 마케팅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에서 한글을 영어로 바꾸는 경우와 아예 해외용 포스터를 별도로 디자인하는 경우가 있다.


5)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 칸, 베니스 영화제를 비롯해, 일 년에도 수십 수백 군데에서 열리는 영화제와 일 년 중 열리는 필름 마켓에서 해외에 소개할 준비를 마친 선재물을 적재적소에 맞춰 발송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해외 배급사에 판매된 경우, 그 영화가 해당 나라에서 극장 개봉하거나 홈 비디오, VOD 등으로 출시되기 위해 필요한 마스터테이프 등의 선재물을 마련하고, 발송, 관리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물론 저 다섯 가지 항목만이 끝이 아닌, 항목들 사이사이, 각 항목의 전과 후에 더욱 복잡다단하고도 세밀하고 세부적인 일들이 하나하나 채워져야 한다.


비단 한국영화 해외 배급에만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일정에 늦지 않고 착착 업무가 진행되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으면, 모두가 행복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칭찬을 들을 일도 거의 없다. 일정에 맞춰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소재가 전달되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기술상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또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일정을 착각하는 경우도 물론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건 나라 팔아먹으려는 역적이라도 된 듯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게 이런 실무 담당자의 고초라면 고초이다.


조대리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한 편 한 편의 한국영화가 해외 배급을 위해 준비되는 과정에 작은 역할이나마 참여하고, 또 여러 가지 다양한 결과물에 대한 자부심과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다.


마치 그 영화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기뻐했던 나날들. 당시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왜 몰랐겠는가? 그 영화들도 결국은 모두 회사의 자산이고, 그 영화의 저작권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회사의 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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