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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31. 2024

회사의 자산과 나의 상관관계

결국 회사의 유무형 자산 중 내 것은 없다

조대리가 한국영화 해외 배급 업무를 한 지 5~6년쯤 되었을 무렵, 아직 제작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흥행 대작은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꽤 기대작이었던 어느 한국영화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영화 본편과 예고편에 유명하거나 아니거나 기존에 발표된 노래를 삽입하는 데 있어, 해당 노래의 작사, 작곡, 편곡은 물론 퍼블리셔 등 한 곡의 노래에 관한 권리 관계를 파악하고, 부르는 게 값이나마나 어쨌든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이제는 관례가 되었다.


그즈음 어느 영화에 꽤 유명한 팝 음악 몇 곡이 삽입될 예정이었고, 그와 관련해 외국곡인 경우 해외의 권리사에게 연락하는 등의 절차가 있었는데, 마침 그 영화와 관련해 조대리는 투자팀 담당자와 이런저런 협업을 하게 되었다. 필요한 경우, 영어로 이메일을 써 해외에 컨택을 한다던가 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이 다 해결된 후였나, 진행 중인 때였나, 해당 영화를 담당하던 투자팀 직원이 조대리에게 말했다.


"조대리님, 저희 영화 일 이렇게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조대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당장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일단 방금 들은 말이 말인지 방귀인지를 판단하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희 영화?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럼 그 영화는 투자팀의 영화이고, 해외팀의 영화는 아닌 건가?'


밖에서 보면 너도 나도 빨강-파랑-노랑 블라썸이 어우러진 C회사에서 월급 받고 다니는 직원이지만, 내부에서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낸 것이었나 싶었다.


국어 문법적으로 굳이 파고들지 않아도, '저희'란 화자 혹은 화자들이 청자를 배제하는, 예의 바르고 공손한 어투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배배 꼬아서 해석하자면) 완곡한 배척의 표현이기도 하다.


'저희'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내 영화'라고 아예 해당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비하면.



지나간 회사 생활을 돌이켜보며 후회와 회한, 아쉬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서도, 주무대리 시절 조대리가 잡지 못한 몇 번의 기회는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C회사의 해외영업팀에서 4년 차가 될 즈음, 같은 업무를 4년 맡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업무순환제'가 있었고, 조대리에게도 해외팀을 제외한 다른 팀 중에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경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조대리는 자신이 그 대상자라는 것을 이미 안 상태에서, 당시 부서장과의 면담에서 두 번 정도 생각 끝에 그 기회를 고사했다. 억지로 등 떠미는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당사자의 결정이 받아들여졌고, 결국 조대리는 그렇게 한국영화 해외 수출의 역군으로 몇 년 더 경력을 연장시켰다.


상대 부서장의 뜻은 알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조대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숫자에 재능이 없기에 재경팀이나 경영관리 같은 부서는 아예 해당 사항이 없었을 테고, 전략기획도 다르지 않은 상황.


그렇다면, 한국영화 투자나 마케팅, 국내 배급팀으로 선택권을 축약할 수 있었는데 영화 관련 경력이 10년을 넘어서던 때였기 때문에, 짧게 겪은 마케팅이던, 곁눈질로 본 투자나 배급이던, 당시로부터 10년, 20년 뒤에 조대리가 지속할 수 있는 업무인지,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판단한 것이 아니다. 조대리는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인생을 계획적으로 사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그저 해외팀 업무에 대한 애정이 컸달까? 뭔가 한국영화를 해외에 알리는 당시 조대리의 업무가 적성에 맞았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업무적으로 만나야 하는 대상이 비교적 한정적인 점도 괜찮았다.



인생에 부질없는 '만약'을 한 번 더 끌어 쓴다면, 만약 조대리가 아직 30대 젊은 대리 시절이었던 그때, 만약 한국영화 투자팀으로 부서를 옮겼다면, 조대리도 담당하는 한국영화에 대해 '내 영화'라고 막 그건 내 거라고 자신의 모든 자긍심을 쏟아부어 그렇게 만천하에 널리 알렸을까? 어차피 만약이라는 가정이기 때문에,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조대리가 했을지 안 했을지는 알 수 없다.


© (연도) Copyright by (회사명). All rights reserved.


모든 영화의 크레디트에 명시되는 저작권 소유에 관한 고지 문구이다. (영화에 관한) 모든 저작권은 회사에 속한다.


자기 돈을 투자해서 제작한 영화가 아닌 이상, 어떤 회사이든 그 회사 직원에게는 월급이라는 대가를 치를 뿐, 그 어떤 영화에 관한 저작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게 영화라는 결과물뿐이겠는가. 내 이름 석 자를 제외하고, 그 회사에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유무형의 자산은 없다.


한국영화 해외 수출의 역군이라는 조대리의 자부심이 흔들리는 순간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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