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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14. 2024

숟가락을 꽂아라

일주일에 한 번, 팀장 주재로 팀원 전체가 모여 각자 그 주에 수행한 일, 다음 주에 해야 할 일을 공유하는 주간회의.


저는 이번 주엔 특별한 건 없고요.

꼭 이 말로 운을 떼지만, 자신의 발언 시간이 다른 팀원의 몇 배를 점유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내용을 듣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중차대한 업무도 있었고, 또 저 정도 적은 비중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굳이 주간회의에서 공유하나 싶은 내용도 물론 있었다.


고지식한 조대리는 생각했다. 비중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해 주간회의록에서 알아서 빼지 말자. 큰맘 먹고 미주알고주알 회의록에 작성한 후, 차마 "저는 이번 주엔 특별한 건 없고요"라고는 운을 떼지 못하고, 어쨌든 깨알같이 작성한 내용을 줄줄이 뀄다.


회의 자리에서 그 내용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팀별 주간회의의 다음 단계인 대표이사 주재 팀장회의록에는 어련히 알아서 '중요한 업무'만 추려진다.


어찌 보면 그게 맞다. 모든 조직에는 해당 사안에 대해 어느 선까지 공유 혹은 보고가 되어야 할지, 어느 정도는 실무선에서 처리되어도 될지, 매뉴얼이 별도로 있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 정해진다.



영화라는 매체가 그렇다. 제 돈 들여 자기 혼자 감상하려고 제작하는 감독이나 제작자는 세상에 없다.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예산 규모에 따라 배급 규모와 홍보 비용이 달라져 영화마다 적정수의 관객 숫자가 달라질 뿐이지, 자기 혼자 보려고 만든 영화라면 남의 돈을 쓸 필요도 없겠지.


그런데 그 영화가 일정 비용을 들여 세상에 공개된 후, 그 영화에 매달렸던 사람들의 희비는 흥행 결과에 따라 엇갈린다. 각자의 기쁨과 슬픔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는 않다. 결과가 좋으면 각자 속으로는 내 공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겉으로는 마케팅을 잘했다, 투자팀이 애썼다, 배급이 훌륭했다, 홍보가 뛰어났다며 서로를 칭찬하기 바쁘다.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누군가의 착오, 실수였다고 탓하기 바쁠 테지.


그런 의미에서 조대리가 속했던 한국영화 해외배급팀은 중간지점 그 어딘가였다. 국내 흥행 결과가 잘 되면 잘 되는대로, 국내 흥행이 죽을 쑤면 죽을 쑨대로, 당장 해외배급이 그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은 미미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칸영화제 초청 혹은 수상, 해외 몇 개국 선판매 등이 국내 홍보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을 즈음, 변방의 북소리나 울리던 해외팀을 찾는 국내 관련팀들의 발걸음이 바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괜스레 조대리의 어깨도 으쓱해지곤 했다.



조대리가 대기업이라고 분류되던 C 회사에 입사하기 얼마 전, 어른들의 사정으로 회사와 회사가 합병해 C 회사의 해외 배급 라인업에 다른 C 회사의 영화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조대리가 입사한 직후 개봉한 <왕의 남자(2005)>가 <실미도(2003)><태극기 휘날리며(2004)>에 이어 역대 세 번째 천만 영화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조대리 입사 즈음 회사 안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화는 <왕의 남자>가 아니라 <태풍(2005)>이었다. 당시 기준, 업계 라이벌이었던 시네마서비스(실미도)와 쇼박스(태극기 휘날리며)가 각각 천만 영화 보유사가 되었으나, 업계 1위로 꼽히던 C 회사에게 아직 천만 영화가 없었다. 


그런데 <태풍>은 안타깝게도 C 회사의 첫 번째 천만 영화 타이틀을 안겨주지 못했고, <태풍>보다 보름 뒤에 개봉한, 시네마서비스 배급 영화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 수를 돌파했다. 얼마 후, 조대리가 속한 해외 팀 몇몇이 <왕의 남자> 천만 축하 자리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관련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자그마한 감사패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달되는 시간이 있었고, 조대리는 두서너 달 동안 <왕의 남자>의 해외 배급을 위한 작은 일들을 담당했던 지라, 혹시라도 자신의 이름도 그 감사패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살짝 기대했다.


하지만, 조대리는 물론이고 해외팀 누구도 그 감사패에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당시 이웃팀에서 주요 나라 몇 군데에 직배를 담당하던 담당자들은 그 감사패를 받았다. 



조대리는 혼란스러웠고 기분이 상했다. '해외배급' 관련 크레디트가 반드시 포함되는 일이 당연하지는 않았던 즈음이라, <왕의 남자>의 엔드 크레디트에도 조대리는 물론 해외팀 자체가 크레디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남자>의 해외 배급을 위한 시작이랄 수 있는 영어 제목부터 예고편과 본편의 영어 자막 작업, 해외 배급을 위한 영어 자막 35mm 프린트 작업, 해외 배급을 위한 마스터 선재 작업, 영문 포스터 작업 등 국내 흥행세가 심상치 않던 <왕의 남자>를 해외에 좀 더 알리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들을 수행했으나, 그 모든 일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듯했고, 그 영화의 천만 돌파가 조대리 개인에게는 그저 '남의 기쁨'이 되어버린 듯했다.


물론, 감사패에 이름이 들어간 이웃팀 담당자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까진 없었다. 그건 그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였달까?


소소하다고 하기엔 어패가 있지만, 각종 기본 선재들은 적재적소에 맞춰 제작만 되면 최소한 욕을 먹지는 않지만, 그 선재들을 가지고 뭔가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오면 그건 칭찬받는다. 


저는 이런 일 하러 이 회사 온 거 아닌데요.

라고 말하는 자는 '큰 일'을 하러 왔으니 자잘한 실무에는 손댈 수 없는 것이고, 일개미는 따로 있는 것이다. 결국 숟가락의 희생자는 애꿎은 일개미이다. 일개미 단계를 벗어나면 역시 내 손에도 숟가락이 쥐어진다. 그 숟가락을 어디에 어떻게 꽂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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