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넘버원 스튜디오'를 표방하던 C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엔드 크레디트 중 '해외배급진행'에 조대리의 이름이 들어간 지 1년쯤 되었을까?
당시 회사에서 제작한 영화 시사회에서 영화 시작 부분에 뜨는 메인 크레디트 중 나와 직급이 비슷했던 직원의 이름이 등장했고(아마도 기획 내지는 제작이었나 그랬다), 시사회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문득 그 광경이 감명 깊었던 조대리가, 그것이 부러움이었는지 뭐였는지 또렷이 알 수 없는 느낌을 슬쩍 말했더니, 누군가가 한 마디로 일갈했다.
크레디트에서는 이름이 최대한 뒤에 나와야 더 오래가는 거야
그때 그 말은 어떤 면에서는 맞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틀리기도 하다. 일종의 젖은 낙엽 이론과도 같은 의미였겠지.
엊그제 무슨 무슨 영화를 봤는데 네 이름이 뜨더라?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가 꺼낸 말이었다. "아 그랬어?"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쿨한 척, 무심한 척 대꾸도 하나마나했지만, 조대리는 사실 속으로는 매우 뿌듯해했다.
영화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참여한 투자, 제작, 배우, 연출, 각본, 촬영, 미술, 음악, 조명, 소품, 매니지먼트, 홍보, 마케팅, 배급, 그리고 해외배급 등에 이르기까지 수십 수백 명의 이름이 깨알같이 올라가는 광경은 이미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서 봐서 익숙하지만, 그중에 조대리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처음에는 꽤 설레는 일이었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영화 <시카고 Chicago(2002)>에서 르네 젤위거 Renée Zellweger와 캐서린 제타 존스 Catherine Zeta Jones가 서로 자신의 이름이 더 먼저, 더 높이 들어가야 한다는 신경전 끝에, 결국 포스터 상단에 이름 배치를 엇갈리게 하는 식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일화만 봐도, 크레디트에 이름이 들어가는 일은 얼굴과 이름을 널리 알리는 존재들에게는 자존심 대결을 부추기기도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라도 10여 년 지속되면 그 감동이 옅어지는지, 영화가 끝나고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 자체에 대한 조대리의 감흥이 점점 사그라질 무렵이었다.
회사 안팎으로, 나라 안팎으로 화제작이었던 <설국열차 Snowpiercer(2013)>의 크레디트에 들어갈 이름이 취합되던 즈음이었다. 취합 시점은 영화 개봉 예정보다 네댓 달 전이었고, 조대리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던 조대리의 부사수가 타 부서로 전배 된 날짜가 바로 직전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이름 취합 시점에 해당 부서 소속이 아니면 그 이름이 빠지는 게 맞고, 조대리는 몇 차례의 확인을 거쳐, 그 후배의 이름을 빼고 담당 부서에 전달했다.
정신없이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세상에 <설국열차(2013)>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배를 가기 전까지 대략 1년 남짓, 그러니까 <설국열차(2013)>의 해외 배급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조대리와 함께 수행했던 그는 당연히 자신의 이름이 '해외배급진행'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었고,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고 했다.
그런데 영화가 다 끝나고 수십 수백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 엔드 크레디트의 그 후배의 이름은 없었고, 그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고 서운하고 화도 나고 그랬나 보다.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리 공감능력과 배려심을 키우려 노력한다 한들, 수개월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까지는 누가 미리 알 수 있겠는가. 영화 크레디트에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뿌듯함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