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는 타고난 언어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여름방학 어린이 영어교실이라던가 대학교 때 강남역 ELS에 꽤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 '영어'와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실체를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카투사로 군복무를 했던 점도 이렇게 저렇게 그럴싸한 포장으로 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한국영화 해외 배급 일을 하려면 영어를 얼마큼 해야 하나요?
조대리 자신이 영어권 국가에서 일정 기간 이상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 '네이티브 스피커'는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 저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래도 기준을 조대리 자신에게 맞추게 되었다. 적어도 외국인과 영어로 소통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고, 거리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업무 진행에 차질이 없는 정도면 되지 않겠냐는 무난하면서도 소박하면서도 겸손한 톤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예전에, 영어로 전화통화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회의실에 혼자 들어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국제전화를 걸었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였는지, 어떤 이유에서 비싼 돈을 스스로 물어가며 회사 전화를 마다하고 자신의 휴대전화로 통화했는지, 그 뚜렷한 이유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조대리는 어쨌든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영어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든, 회사 일에는 1원도 사비를 써서는 안 된다는 그런 신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조대리가 지금은 사라진 고양 국제 어린이영화제 프로그램 팀장 일을 할 때였다. 당시 이메일을 중심으로 러시아 쪽 배급사와 연락을 주고받던 중, 뭔가 진행이 지지부진했던지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나누면 해소될 것 같은 어떤 사안이 있었다. 모스크바와 시차를 따져보니 대략 맞겠다 싶었던 이른 오후, 2m쯤 되는 높은 파티션으로 나뉘었지만 소리는 차단되지 않는 사무 공간에는 조대리 외에도 여러 명의 직원들이 근무 중이었다.
모스크바로 국제 전화를 걸려던 그때, 조대리는 예전에 들었던, 회의실로 들어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국제전화를 걸었다는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조대리가 러시아어 능통자가 아니기에, 이메일도 영어로 소통해 왔으니, 전화 통화도 당연히 영어를 써야 할 텐데, 그럼 2m는 훌쩍 넘지만 소리는 차단하지 않는 파티션 너머로 조대리의 영어가 널리 울려 퍼질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각자 맡은 업무를 보고 있겠거니, 이 정도 짧은 통화를 뭘 듣고 있겠냐는 생각에 조대리는 과감하게 모스크바로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 역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오전 내내 그 통화 건에 신경을 쓰느라 시차 계산을 잘못했는지, 아직 점심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당황한 조대리는 "거기 지금 오후 1시 아니야?"라고 물었다.
순간, 다른 직원들이 각자 업무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대리. 당시 직원들끼리 연결돼 있던 네이트온 메신저로 누군가가 보낸 "조대리 팀장님, 지금 모스크바는 아직 오후 12시예요"라는 메시지가 깜빡였다. 메시지를 보낸 그는 조대리가 영어로 통화하는 내용을 숨죽여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네이트온 메시지로 충분히 짐작가능한 그림이 떠올랐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다.
최근 출시된 삼성 갤럭시 Z 플립 6의 새로운 기능 중에 더욱 발전된 AI 통번역 기능을 강조하는 광고를 보며, 네이티브 스피커는 아니지만 영어로 이메일을 쓰고, 전화통화를 하고, 직접 만나서 미팅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업무를 자신이 가진 영어 실력을 활용해 진행했던 때가 떠올랐다.
미래에는 AI로 대체되는 인간의 일자리가 몇 백, 몇 천, 몇 만개가 될 것이라는 예측과 관측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지만, 영어를 할 줄 알거나, 영어를 곧잘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아니더라도, 아니 영어를 단 한마디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갤럭시 Z 플립 6을 가운데에 놓고 해외 바이어와 미팅하는 그림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나?
하긴, 11년 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Snowpiercer(2013)>에서는 남궁민수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해도 작은 원반처럼 생긴 통역기가 있으니 어쨌든 커티스와 소통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영어 좀 한다'는 게 뛰어난 재능으로 각광받지 못하는 세상이 너무 빨리 와버린 건 아닌지, 조대리의 마음속에는 괜스레 서운함까지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