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는 자 vs 기억하지 못하는 자
반드시 영화 일이 아니더라도, 한 번만 만나도 상대방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과 한두 번 만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일하는 데 더 유리할까?
기왕이면 한두 번 만났어도 상대방을 잘 기억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지만 또 그게 그렇게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인가 싶기도 하다.
첫인사를 나누며 받은 명함에 그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메모해 놓으면, 그 사람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적이 있었고, 조대리도 한때 그렇게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모를 멈췄다.
안경을 썼거나 안 썼거나, 키가 작거나 크거나, 눈이 작거나 크거나, 아무튼 갓 만난 상대방의 신체적 특징을 그 사람의 명함에 쓰는 일이 뭔가 탐탁지 않아 졌다.
전화 통화로만 소통하던 다른 회사 직원을 직접 만날 일이 생겼을 때였다. 그 사람은 조대리를 처음 만난 순간, 너무 의아해했고, 그런 의아해하는 상대방을 모습을 보던 조대리도 의아해졌다. 대체 왜 그럴까?
이유를 듣고 보니, 전화 통화로만 대화할 때엔 조대리가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스타일인 줄 알았다는 것. 실제 만나보니 정반대여서 놀랐다는 것이었다.
자기 명함도 아닌 다른 사람이 준 명함에 그 사람의 특징을 쓰던 조대리는 그 의아해하던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그날 그의 의아해하던 기묘한 분위기만은 또렷이 기억났고, 만약 누군가가 내가 건넨 명함에 나의 신체적 특징을 적는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다음번에 다시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그의 신체적 특징을 남몰래 메모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조대리는 카투사로 근무할 당시, 모든 계급의 카투사와 미군이 전입 때 장비를 받고, 전출 혹은 제대할 때 그 장비를 반납해야 하는, 한 마디로 적어도 두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비 보급 관련 일을 했다.
군복과 군화 사이즈에 맞는 장화나 우비, 고어텍스 재킷, 그리고 각자의 머리 둘레에 맞는 하이바를 비롯해, 야전삽이나 수통 등등 50가지나 되는 장비들을 오전과 오후에 나누어 나눠주고, 반납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미군을 직접 상대하더라도 사용하는 영어는 거의 같았고, 낡은 장비에 대한 불만도 접수하기도 하고, 새것을 나눠줄 때 받는 사람이 기뻐하면 조대리도 덩달아 기뻐하는 등 어느새 해당 업무에 익숙해져 갔다.
카투사 네 명이 근무하는 곳이었고, 오후 3시 반에 컴퓨터를 끄면 4시에 무조건 칼퇴근을 하는 바람직한 근무처였고, 한국 민간인 아저씨들과 일하기 때문에 4시에서 1분이라도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2년 동안 멤버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 2년 동안 조대리가 간간이 겪었던 일들이 있었다. 다른 세 명과 함께 캠프 안에서 출퇴근을 할 때, 어쩌다 저쪽에서 지나가던 미군이 부른다. 나머지 셋이 아닌 조대리만 콕 집어서.
조대리는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는 미군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미군 쪽에서는 네 명의 카투사 중에서 유독 조대리를 기억하고는 굳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하루에도 많을 때엔 수십 명이 거쳐가는 곳이다 보니, 그 미군 입장에서는 '아, 장비를 나눠주던 그 카투사'라고 기억하겠지만, 조대리 입장에서는 반대의 경우였기 때문인지라, 장비를 내주고 반납받을 때 상대방을 굳이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갈 길을 갈 때였다. 함께 있던 동료가 저 미군 누군지 아냐고 조대리에게 물었고, 조대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조대리가 C 회사에 입사한 지 4~5년쯤 지났을 무렵이던가. 부산 국제영화제 기간 중 열린 어느 행사에 참석했다가, '스탠딩 파티' 스타일의 그 행사에서 활발하게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는 대신,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고 언제쯤 그 자리를 떠야 하나 궁리하던 때였다.
저쪽 편에서 조대리와 비슷한 연배이거나 좀 많거나, 아니 사실은 정확한 연배를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조대리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저쪽에서 쳐다보는 게 느껴지면 눈길을 피하고, 그러다 또 마주치고, 또 피하는 와중에도 조대리는 자신과 계속 눈 맞춤을 하는 그 사람이 어떤 영화를 할 때 두어 차례 만난 적이 있다는 기억은 용케도 떠올렸으나, 그 영화 제목만 떠오를 뿐, 그 사람의 이름이 때려죽여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마주칠 만큼 마주쳤다고 판단해서였을까. 그 사람이 조대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 걸음걸음이 마지 조대리가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시험이라도 하려는 저승사자의 걸음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는다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누고 난 후, 보통 영화제나 마켓에서 만나는 덜 친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상투적인 대화가 오갔다. 영화제 초반에 만나면 '언제 왔냐, 숙소가 어디냐'라고 묻고 답하고, 영화제 중후반에 만나면 '언제 돌아가냐'로 귀결되는, 서로가 알지 못해도 인생에 하나도 손해 볼 것 없는 형식적인 대화를 조대리와 그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못하는 조대리의 표정만큼이나,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조대리의 죄책감이 눈빛에 드러났는가 보다. 그 사람은 갑자기 자기가 누군지 아냐고 조대리에게 물었고, 뭘 도통 숨기 지를 못하는 조대리는 순간 위기를 모면한답시고, 애먼 명함을 꺼내며 내밀었다.
하하하, 기억 못 하긴요. 오랜만에 뵀는데, 제 새 명함 드릴게요
하지만, 그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에이, 기억 못 하시네
라며 훅하고 들어왔다. '맞아요, 맞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성함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조대리가 너무 난감해하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그가 새 명함을 조대리에게 내밀었고,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그 순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난다. 대신 그 사람의 얼굴이 가물거린다.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는 대신 얼굴을 못 알아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