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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19. 2023

S#1-6. 예술영화의 은밀한 유혹

지적 허영심의 불꽃을 태우다

한국에 예술영화 전용관이 생기고,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고정 코너를 즐겨 듣고, 영화 전문 월간지 『키노』를 열독 하면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Krzysztof Kieślowski, 장 피에르 쥬네 Jean-Pierre Jeunet & 마크 카로 Marc Caro,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데이비드 린치 David Lynch 등 '씨네아스트' 들의 이름을 곱씹던 시절이 있었다.


으뜸과 버금이었나 영화마을이었나 예전 동네에서 가까이 있던 비디오 대여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Dekalog(1989)>, 린치의 <트윈 픽스 Twin Peaks> 시즌 1~2(1990~1991) 전편을 빌려다 몇 날 며칠 동안 보기도 했고, 대학로에 있던 동숭시네마텍이나 종로 3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에서 역시 또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Trois Couleurs> 시리즈(1994~1995)나 쥬네 & 카로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La Cité des enfants perdus(1995)> 등을 보며 마음속 깊이 잠자고 있던 지적 허영심에 마구 불을 붙였다.



그러다 예술영화에 대한 나의 지적 욕망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 있었으니, 영화 애호가들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영화 공간 씨앙씨에를 찾아가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Nostalghia(1983)>와 <희생(Offret) The Sacrifice(1986)>을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 본 일이었다.


두 영화를 합쳐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선명하지 않은 화질은 둘째 치고, 아주 작은 TV를 통해 너덧 명 남짓의 열혈 씨네필들이 좁은 방에 모여 숨죽여 타르코프스키의 걸작을 본다는 행위 자체는 어딘가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마치 씨네필 자격시험을 보기 위해 반드시 봐야만 하는 필독 영화처럼, 그 영화들을 봐야만 한다는 어떤 사명감과 의무감이 들었던 탓인지, 나는 그 두 영화를 보고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영화들의 가치를 못 알아챘다고 해서 자괴감까지 느낄 필요도 없다.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방향으로든 내 마음이 움직이면, 그 영화가 내게는 재미있는 영화인 것이니까.


그날 그 숭고한 체험 이후, 예술 영화 전용관에서 큰 스크린과 비디오테이프보다는 훨씬 선명했을 화질로 두 영화를 다시 봤지만, 역시 나는 별 감흥을 얻지 못했고, 이후 20여 년이 훨씬 지나도록 아직 <노스탤지어>와 <희생>을 다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른바 예술 영화를 보는 데에만 온 힘을 다했을 리가 없지. 마틴 스콜세지 Martin Scorsese, 팀 버튼 Tim Burton, 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óvar, 우디 앨런 Woody Allen,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데이비드 핀처 David Fincher, 폴 토머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왕가위(王家衛) Wong Kar-wai, 리안(李安) Ang Lee 등 신작이 발표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감독 리스트는 점점 더 풍성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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