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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18. 2023

S#1-7. 콜 미 바이 마이 잉글리시 닉네임

영어 이름이 뭐예요?

대학에서 특정 학과를 전공하겠다는 굳은 결의 따위 없던 나는 오직 고3 때 성적을 기준으로 거기에 맞는 학교와 학과를 정했다. 그렇게 1 지망을 스페인어로, 2 지망은 프랑스어로 정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선택은 내가 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건 성적에 맞춰 학교와 학과를 정하는 과정에서 담임선생과 부모님의 면담으로(좀 더 정확하게는 어머니) 정해진 것으로, 가고 싶던 학교고 학과고 간에 성적이 맞지 않으면 원서에 쓸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여서 그랬는지 그해 마지막 학력고사의 출제 난이도는 다소 낮았다고 했고(어쩐지 뭔가 수학을 제외하고는 평소보다 술술 풀린다 싶었다), 점수 인플레의 대환장극이 펼쳐졌다. 온 가족이 모여 합격 여부를 확인하던 자리, 1 지망을 보기 좋게 떨어졌고, 학력고사에 맞춰 3년 내내 공부했던 터라, 갑자기 새로운 입시제도에 맞춰 뭘 어째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굳이 고백하자면, 새로운 입시 제도에 어떻게 맞춰야 할 지에 대한 막막함보다, 뭔가 지옥 같은 1년 동안 개봉하는 새 영화를 볼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 생각이 나다니...


침울한 분위기를 깨고, 막내이모가 외쳤다! '2 지망이 있잖아!'


보통 2 지망은 1 지망보다 훨씬 낮은 학과로 쓰는 게 불문율인데, 스페인어학과보다 높거나 비슷한 프랑스어학과를 적었으니, 어차피 끝이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다시 ARS를 통해 합격 여부를 확인했고, 웬일로 2 지망에 합격했다는 로봇 같은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고, 태어나서 프랑스어를 전혀 배워보지 않은 나는 합격이 결정된 후 두 달 남짓 동안 A 어학원에 등록했다. 아주 생기초더라도 배워놓고 대학교라는 곳에 가야 경쟁할 꿈이라도 꿀 수 있으니까.


프랑스 배우 Sophie Marceau의 이름을 ‘소피 마르소’라고 쓰긴 하지만 발음은 ‘소퓌이 마흐소’에 가깝게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신났었다. 이자벨 아자니 Isabelle Adjani, 엠마뉴엘 베아르 Emmanuelle Béart, 꺄뜨린느 드뇌브 Catherine Deneuve, 다니엘 오떼유 Daniel Auteuil, 이브 몽땅 Yves Montand... 알고 있는 프랑스 배우들의 이름을 최대한 새로 배운 원어 발음에 가깝게 읊조리다 지칠 지경이었다.



전공 수업인 불어 회화 첫 수업 시간, 원어민 교수가 각자 프랑스 닉네임을 정하라고 말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내가 아는 프랑스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이 총동원되었다. 출석 번호 순서대로 하다 보니 나보다 번호가 앞선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프랑스 닉네임을 말하는데,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프랑수아를 앞선 다른 친구가 말해버렸다.


차선책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 차례가 왔을 때 떠올랐던 이름은 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이름 ‘Gérard’에는 ‘r’이 두 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r’을 ‘흐’로 발음한다는 건 학원에서 배웠는데, ‘흐’와 ‘흐’ 사이에 ‘a’가 있으니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미처 학원에서 배우지도 못한 어려운 이름을 한 학기 동안 내 닉네임으로 써야 한다니, 난감했다.


입을 열기 전에 머릿속으로 먼저 발음을 궁리하던 내가 입을 열고 ‘제하흐’ 정도의 무리한 발음으로 말하자, 아니나 다를까 원어민 교수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원어민 발음으로는 ‘제하’에 가까웠고,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내 프랑스 닉네임은 ‘제하’였다. 하지만, '제라르'가 아닌 '제하'의 발음에 가까운 그 이름은 내 귀에 익숙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교수가 '제하'라고 나를 불러도 그게 나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미소 지으며 뭉개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다음 학기던가, 다음 학년인가에 내 프랑스 닉네임을 '뤽 베송'의 '뤽'으로 잽싸게 바꿨다. 어차피 프랑수아는 빼앗긴 이름이라 쓸 수 없을 바에는, 귀에 익지도 않은 '제하' 대신 뤽 베송의 영화를 좋아하니 '뤽'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뤽'이라고 바꿔봐야 그 이름이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우리말로 아무리 해석을 해도 개념이 전혀 와닿지 않는, 12 시제가 등장할 즈음부터 나는 전공과목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는,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의 학점만 들으며 어서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그다음 단계로 옮겨가고 싶었다.



역시 영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그것이 전공과목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잃어버린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1학년 말인가 2학년 즈음부터 강남역에 있었던 E 어학원에 주 5일 영어회화 수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매일 2시간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수업에서 통용되는 닉네임을 반드시 정해야 했다. 내 이름은 성 빼고 이름 두 글자에 모두 받침이 알차게 자리 잡고 있어서, 외국인이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그렇게 발음 가지고 헤매는 꼴을 보며 매번 올바른 발음을 알려주느니, 영어 닉네임을 골라보는 일이 훨씬 시간도 에너지도 절약하는 방법이었다.


수년간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거치며, 별의별 닉네임을 다 들어봤다. 자신이 칼같이 곧은 성격이라며 우리말과 영어를 섞은 '칼맨'이라고 불러달라던 어느 회사원 아저씨부터, '우주소년 아톰'을 좋아한다고 자신의 닉네임을 '아톰'이라고 정했지만, 미국 원어민 강사가 't' 발음을 뭉개면서 '애럼'이라고 부르자 김이 팍 샌 표정을 짓던 어느 여자 수강생도 기억난다.



이번에는 내 차례. 한 달에 한 번씩 새로운 강사를 맞이하면서, 나는 매달 영어 닉네임을 바꿨다. 그때그때 내가 바꾸고 싶은 대로, 느낌 가는 대로 닉네임을 한 달에 한 번씩 바꿨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Four Weddings and a Funeral(1994)>을 보고 나서는 주연 배우 휴 그랜트 Hugh Grant의 이름을 따서 ‘휴’, <온리 유 Only You(1993)>를 보고 나서는 주인공에게 차인 가련한 약혼자 캐릭터 이름을 딴 ‘드웨인 Dewayne’, 워런 비티 Warren Beatty 감독, 주연작 <레즈 Reds(1981)>를 보고 나서는 잭 니컬슨 Jack Nicholson이 연기한 실존 인물인 작가 유진 오닐 Eugene O’Neill의 이름을 딴 ‘유진’, 배우 윌리엄 홀든 William Holden의 이름을 딴 '윌리엄' 등 한 달짜리 잉글리시 닉네임이 매번 바뀌었다.


하도 달마다 이름을 바꾸니, 예전에 수업을 들었던 강사가 복도에서 나를 마주칠 때 ‘안녕, 유진’하고 내게 인사를 하면, ‘이제 내 닉네임은 유진이 아니야, 드웨인이야.’ 이렇게 말해주면 굉장히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Whatever'를 연발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4년 2월과 7월, 브라이언 애덤스 Bryan Adams의 "So Far So Good" 투어를 서울과 파리에서, 1년에 두 번 보게 된 진귀한 경험을 하고는, 내 닉네임을 브라이언 애덤스의 '브라이언'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식이 아닌 캐나다식 브라이언이라 'Brian'이 아니라 'Bryan'이라고 내 자체적으로 결론짓고는 마치 나의 두 번째 이름처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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