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귀촌을 결정한 C 형의 환송회를 위해 모임 약속이 있었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약속 시간 전에 먼저 영화를 보려고 시내버스를 타고 대학로로 향하던 나는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져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가 섰다. 목적지까지 불과 몇 미터 남지 않은 상태였고, 곧 그날 만나기로 한 친구 중 S가 보낸 문자 메시지에 답하기 위해 안정적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잠시 놓고 답장을 하려던 찰나였다.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한산하던 버스 출구 쪽에 서 있던 나는 입구 쪽으로 몸이 날려졌고 동전통에 머리를 박았다. 다행히 기절하진 않고 바로 정신을 차린 나는 손에 쥐어져 있던 스마트폰을 우선 찾았다. 내 몸이 날리면서 스마트폰도 덩달아 날아갔고 입구 계단 쪽에 안착해 있었다.
알고 보니, 예닐곱 살쯤 된 개구쟁이 남자 어린이가 갑자기 찻길에 뛰어들었고 이를 본 기사분이 급정거를 했던 것. 천만 다행히도 그 어린이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초등학생 어린이 중 하나가 이마를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약간 피를 흘리며 울고 있었다.
나는 일단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요즘과 같이 주행 중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던 시절이 아닌지라, 일단 기사분이 연락처를 손에 쥐어주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예매했던 영화 <끝까지 간다>를 보는데, 왼쪽 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가 참 재미있었고, 욱신거리는 팔의 원인이 뭔지도 모른 채 일단 <끝까지 간다>를 끝까지 봤다.
그날 저녁 모임에서 C 형의 귀촌 생활을 한껏 응원해 주는데, 왼쪽 팔이 계속 욱신거렸다. 그래도 일단 그 자리는 끝까지 함께 했고, 다음 날 아침 회사에 미리 연락을 하고 집에서 가까운 정형외과를 찾았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왼쪽 팔 뼈에 실금이 갔단다. 결국 6주 정도 반깁스를 해야만 했다. 때는 아직 무더운 한여름의 문턱에 접어든 6월 초였다, 다행히.
어릴 때, 덧붙이자면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철딱서니 없던 때에 세 가지 소원 아닌 소원이 있었다.
치아 교정, 깁스, 안경.
고 1 때 안경 타령을 듣다 못한 어머니가 당시 유행하던 잠자리 테에 보안경을 맞춰 주셨으니 첫 번째 소원은 일찌감치 클리어했고, 20대 초에 치아 교정을 1년 정도 했으니 두 번째 소원도 성취.
그런데 이미 20대를 넘어서면서 깁스에 대한 생각은 점점 옅어지더니 아예 사라진 때였는데, 30대 후반에 반깁스라니! 생각해 보니, 저 세 가지 소원의 근원은 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을, 반깁스를 하고 다니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평소 마주쳐도 개 닭 보듯 하는 전혀 안 친한 회사 동료라던가, 평소 딱히 따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대표님이라던가, 하다 못해 건물을 관리하시는 직원분들까지 일단 반깁스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면 일단 걱정스러운 눈빛을 건네고는 어쩌다 다쳤는지 질문했다.
그렇게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수십 번 이상 질문을 받다 보니, 반깁스를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도가 터서, 중요한 포인트만 집어서 요약하게 되더니 나중에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인 양 극적인 순간을 과장하기까지 했다.
반깁스를 풀고 나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반깁스를 하게 된 스토리를 들려줄 필요가 없어졌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치른 지능지수 검사, 즉 아이큐(IQ) 테스트 결과를 알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시험 성적이 부모님의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서였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너는 아이큐가 ㅇㅇㅇ인데 어찌 그리 공부를 못 하냐”는 질책이었는데, 내 귀에는 앞뒤 말은 안 들렸고, 오직 세 자리 숫자만이 귀에 꽂혔다. 이후 내 성적이 올랐느냐면 전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세 자리 숫자만이 마치 마법의 지팡이처럼, 죽어라 공부하지 않아도 시험 점수가 뾰로롱~하고 잘 나올 것만 같은 일종의 명약으로 생각했던 것.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그때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긴, 사람이 살면서 매 순간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어찌 됐든 어느 날 갑자기 복잡한 수학 공식을 척척 푼다던가, 기상천외한 암기력을 발휘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내 뇌리에 박혀있던 세 자리 숫자의 존재감은 점점 흐려졌다. 시험 성적에 인생이 좌우되는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서였겠지.
그러다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 조디 포스터 Jodie Foster가 멘사 회원이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고 난 후, 멘사 출신이라 다국어를 구사하고, 자신이 멘사니까 타고난 천재 아들을 둔 엄마의 이야기인 영화 <꼬마천재 테이트 Little Man Tate(1991)>의 연출과 주연을 맡았구나, 갑자기 조디 포스터에 대해 전에 없던 존경심까지 일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멘사 입회를 위해 거쳐야 한다는 아이큐 테스트에 응시했다. 테스트 날짜는 마침 연말에 있는 내 생일 당일이었고, 서울에 있는 S 대학교가 시험장소였다. 눈발이 흩날리던 그 추운 겨울날, 처음 가보는 남의 학교까지 가서, 굳이 이 테스트를 보다니! 내가 생각해도 나의 오지랖인지 설레발인지, 웃기고 재미있었다.
어느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있자니, 나 말고도 멘사가 되기 위해 수만 원의 응시료를 낸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았고, 개중에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시험은 시험이라고 괜스레 긴장도 좀 되고 그러던 차에, 간사분이 들어오더니 주의 사항을 말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문항 개수가 40개인데 초반에는 너무 쉬워서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술술 풀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점점 어려워지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도통 답을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렵다고 답 칸을 비워두면 아이큐 결과가 두 자릿수 이하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큐 테스트를 보러 가서 머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결과지를 우편으로 받았는데, 거기에는 고등학교 때 들었던 세 자리 숫자보다 조금 높은 세 자리 숫자와 함께 내가 응시했던 회차의 전체 응시인원 중 상위 몇 퍼센트에 속한다며, 당당히 멘사에 입회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나라라도 구한 듯한 뿌듯함이 가슴속에 벅차올랐다.
멘사 입회 시, 멘사 협회가 있는 나라 중의 한 곳을 고를 수 있었는데, 잠시라도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회원이 될까 생각했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면 조디 포스터와 같은 미국 멘사 회원이라도 되고 싶었으려나.
이후에 멘사 회원 정례 모임이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두어 번 받았는데,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어디서 듣기로는 멘사 회원들끼리 모임에서는 서로 수학 문제를 풀기도 한다던데, 일찍이 수학을 포기한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큐 테스트에 수학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대신 이후에 작성한 이력서 중 자격증 항목에 따로 쓸 것이 없길래 빠뜨리지 않고 멘사 회원임을 밝혔는데, 멘사 회원이라는 사실이 가끔 화제의 중심이기도 했고, 때때로 나를 잘 모르거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특징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이럴 거면 연회비를 꾸준히 계속 내고 회원 모임에도 열심히 나갈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어떻게 멘사 회원이 되었는지, 될 수 있는지, 되면 뭐가 어떤지, "아, 이 친구가 그 멘사?" 이런 사람들의 감탄을 들으며 우쭐했던 때를 생각하면, 마치 치아 교정과 안경, 깁스를 하고 싶어 했던 내가 떠오른다. 주변의 관심에 굶주린 관종처럼.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해 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나는 '멘사'라고 하면 의례히 수학 천재를 연상시키는 사람들에게 '내가 수학을 포기하게 된 이유'부터 설명하고 싶어지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한 적은 없다.
문득, 가짜 천재 과학자와 진짜 수학 천재가 등장한 상반된 분위기의 두 영화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