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하면 또 떠올라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영화들
흥행에 참패했거나, 평론가들로부터 대차게 외면당하는 영화가 한 두 편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매몰차게 내쳐진(?) 영화들 중에, 유독 내 마음속에서만은 흥미진진한 재미와 흥미를 돋우는 영화가 몇 편 있다. 몇 년에 한 번이라도 다시 보게 될라치면, 볼 때마다 또 새롭고 또 재미있는 그런 영화들은 나에게 '길티 플레저 Guilty Pleasure'이다.
네덜란드식 발음으로는 ‘파울 페르후번’이지만, 미국식 발음인 ‘폴 버호벤’이 더 익숙한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 Paul Verhoeven의 대표작이라면, <로보캅 RoboCop(1987)>이나 <토탈 리콜 Total Recall(1990)>도 있지만 <원초적 본능 Basic Instinct(1992)>을 첫 손에 꼽는 이가 많다. 그런데 내 마음속 버호벤의 대표작으로 <쇼걸 Showgirls(1995)>을 빠뜨리면 몹시 서운하다.
<원초적 본능(1992)>의 대성공에 이은 차기작으로,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기대작에서, 1995년 당시 미국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악명 높은 ‘NC-17(17세 이하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아 배급사인 MGM/UA의 골칫덩이로 전락하더니, 결국 흥행 참패에다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면치 못한 졸작으로 전락해 버린 비운의 영화이다.
당시 <쇼걸(1995)>을 극장에서 두 번 봤는데, 한 번은 우리나라 개봉 당시 강남역 인근에 있던 시티극장에서 가위질로 인해 필름이 팝콘처럼 튀는 ‘한국 개봉 버전’이었고, 두 번째는 프랑스 파리 여행 당시 어느 멀티플렉스 대형 관에서 본 ‘프랑스 개봉 무삭제 원본’이었다. 단순히 가위질이 문제가 아니라, 파리에서 본 <쇼걸(1995)>은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본 <쇼걸(1995)>은 마치 라스베이거스에서 라이브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초대형 스펙터클 엔터테인먼트’였다.
같은 영화여도 이렇게 관람하는 환경에 따라 아예 다른 감흥을 줄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엉성한 치정극으로 욕받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영화 <쇼걸(1995)>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달까. 그때 이후 <쇼걸(1995)>은 내 인생의 영화이자 불후의 걸작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일은 주저하면서도, 고화질 블루레이로 가끔 보게 되는 나만의 길티 플레져 영화 1순위가 되었다.
일상이 정글이던 시절, 자주 떠올리던 영화로는 하나의 스타일이자 장르가 된 일본 영화 <배틀로얄(2000)>도 있다. 섬 안에 갇혀 3일 밤낮 동안 오직 1명의 우승자가 되기 위해 용쓰는 시로이와 중학교 3학년 B반 42명 중에 내가 속해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오싹하면서도 엉뚱한 상상을 펼치게 만드는 영화이다.
한 명의 승자가 살아남기까지 피 튀기는 승부를 거쳐야 하는 영화 속 '배틀로얄'은 어쩌면 실제 무기를 들고 있지 않지만,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회사생활에서 느꼈던 오만가지 갈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Robert Rodriguez의 <패컬티(1998)>도 빼놓을 수 없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이미 무시무시한데, 외계인이 장악한 고등학교라니.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위압적인 교사들이 먼저 외계인 숙주에게 먹혀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고, 이를 눈치챈 우리의 하이틴 스타들이 숙명의 한판 대결을 펼친다. 거기에다 다소 뜬금없어서 헛웃음을 유발한 충격적 반전까지!
‘X세대 스타일’의 세기말 호러 액션의 진 맛을 느끼고 싶을 때면 <패컬티(1998)>를 보면 된다.
치정 스릴러라면 고(故) 강수연 배우와 당시 오랜만에 컴백한 이보희 배우의 맹활약이 펼쳐지는 <장미의 나날(1994)>을 첫 손에 꼽고 싶다. 개봉 당시 흥행 성적도 기대에 못 미쳤고, 반응도 그저 그랬지만, 화려한 외모와 재력을 갖춘 내연녀에게 홀딱 빠져버린 남편,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애 끓이는 아내, 그런 아내 곁에 묵묵히 머무는 서브 남주, 전형적인 치정 멜로를 위한 인물 구도의 클리셰를 깨부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매력이다.
그리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알고도 속는 느낌이지만, <장미의 나날(1994)>이 감추고 있던 반전이 주는 쾌감은 쉽게 거부할 수 없다.
<장미의 나날(1994)> 못지않은 치정 스릴러로는 심혜진, 진희경, 이경영 배우의 피 튀기는 삼각관계를 그린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손톱 Deep Scratch(1995)>도 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장미의 나날(1994)>과 <손톱(1995)> 모두 이경영 배우가 등장한다.
<손톱(1995)> 또한 '여적여(女敵女)'의 클리셰를 고스란히 답습하지만, 빌런 쪽을 담당하는 진희경을 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심혜진 쪽에서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직업적 성취,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결혼생활 등으로 이룰 것 다 이뤘다는 오만한 태도로 진희경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와 분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요소이지만, 사람이 꽉 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올라타고서 진희경에 대한 험담을 풀어낸 데다, 하필 엘리베이터 맨 안쪽에 험담의 당사자인 진희경이 타고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들은 것! 그리고 본격적인 복수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뒷담화는 금물이라는, 영화의 본질과 약간 비켜난 교훈까지 얻었다.
나만의 길티 플레져 영화들은 나만 혼자 듣고 싶은 노래들로 채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