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가본 다른 나라는 프랑스였다. 파리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한 달간 어학연수랍시고 단체로 갔던 것인데, 수업을 담당한 프랑스 여자 선생님이 자꾸 내 이름의 'ㅊ'를 '샤'로 발음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짧은 불어를 총동원해 '차'로 발음해 달라고 말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고, 두어 번 수업을 나갔다가 마침 같은 연수팀 누나 한 명과 죽이 맞아, 우리 둘 다 남은 수업을 제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수업료로 낸 돈이 매우 아까운 일이었다.
그러다 남은 기간 동안은 파리의 유명한 장소들을 다니며 그 도시를 즐기고 싶었고, 우연히 알게 된 주간정보지『파리스코프 Pariscope』에는 파리 시내 20구 곳곳에 있는 모든 영화관의 일주일 치 상영 일정과 공연, 전시 등 각종 문화 정보가 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파리의 일반 극장에서 우리말이나 영어 자막이 없는 것은 너무 당연했으나, 나는 파리의 극장은 어떤지 알고 싶어서, 당시 한창 상영 중이던 <여왕 마고 La Reine Margot(1994)>를 보러 샹젤리제의 어느 극장에 들어갔다. 2시간을 훨씬 넘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 속 대사를 거의 한 마디도 못 알아들은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나마 미국 영화인 <시리얼 맘 Serial Mom(1994)>은 비교적 마음 편하게 봤으니 다행이었고,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하거나 수입된 적이 없으니, 그때 극장에서 본 사실이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다음 해 여름에는 당시 텍사스에 사셨던 막내 이모 댁에 놀러 갔다가, 미국 극장 체험을 실컷 하게 됐다. 그해 여름 개봉한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를 거의 두 달 동안 다 보고 왔다.
프랑스와 미국의 극장 모두 우리나라 극장과 달리 지정좌석제가 아니었고, 영화 시작 전에 주로 개봉 예정 영화의 예고편 위주로 아주 길게(2~30분 정도) 먼저 보여주고 나서, 본편 상영이 이어졌다.
특히 파리에는 UGC나 고몽과 같은 멀티플렉스 체인부터 고전 영화들과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전용관, 그리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등 영화 팬으로서는 몇 날 며칠 영화만 보며 살아도 좋을 것 같은 시네마 천국 그 자체였고, 미국의 극장은 거기대로 (당시 가본 곳은 텍사스 어느 쇼핑몰이 전부였지만) 거대한 쇼핑몰 안에 극장이 있어서, 영화 보기 전후에 뭔가 먹고 마시거나 쇼핑을 즐기는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점이 부러웠다.
우리나라에 들어선 첫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이 이후 몇 년이 지나서야 들어섰으니, 나름 발 빠른 신문물 체험이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그해 겨울, 당시 파리로 유학을 떠난 선배 형과 출국길에 동행해 6주간 파리에 다시 머물 기회가 생겼다. 두 번째 파리 방문이었던 그때, 내가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으니, 말로만 들었지 볼 기회가 전혀 없을 것만 같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 愛のコリダ(1976)>였다. 논란의 이 영화를, 단 1초도 잘리지 않은 완전한 버전으로 파리의 어느 극장에서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 날뛰고 싶었다.
극장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30석이나 될까 싶은 아주 작은 상영관이었고, 스크린이 천장 가까이 달려있어서 의자에 앉아 뒤로 기울여 약간 시선을 위로 두는 식이었다. 주 1회 상영하는 그 회차에 맞춰, 그 작은 극장이 거의 꽉 찼었던 게 더욱 놀라웠다.
침을 꼴깍 삼킬 새도 없이, 순식간에 109분이 지났다. 극장 안에 불이 켜졌지만 벌떡 일어나기도 버거울 정도로 몰입했던 순간이었다. 같이 본 친구가 있었다면 몇 시간이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극장 안에 있었던 프랑스 씨네필 누구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으나, 나에겐 그 정도의 패기는 없었기에 마음속에 간직만 하기로 했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선배 W가 마침 프랑스 영화 채널에서 방영한 <감각의 제국>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선배가 보내준 테이프는 내가 가진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볼 수 없었다. 영상 출력방식 자체가 우리나라는 NTSC 방식이고, 유럽은 PAL 방식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청계천 전자상가를 무작정 찾아갔다.
물어물어 찾아간 어느 가게의 사장님은 내가 들고 간 PAL 방식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영화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고, 순진한 나는 <감각의 제국>의 내용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사장님은 마치 내가 엄청난 불법 영상이라도 유통하는 범법자인 양 삐딱하게 쳐다보더니, 변환작업을 단칼에 거절했고 나는 쫓겨나듯 그 가게를 나왔고, 결국 그때 이후 그 PAL 방식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감각의 제국>을 재생해 영화를 다시 볼 기회는 없었다.
시간이 더 흘러, 비디오테이프가 DVD로, DVD가 블루레이로, 블루레이가 4K로 저장매체는 점점 더 발달했고, 미국의 홈비디오 배급사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The Criterion Collection, Inc. 에서 출시한 <감각의 제국>의 블루레이를 구매한 그날도 파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순간의 감흥과 청계천의 푸대접이 함께 떠올랐다.
래리 클라크 Larry Clark의 충격적인 데뷔작 <키즈 Kids(1995)>를 본 것도 그해 겨울 파리에서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 네 명의 비행(非行)을 가감 없이 영상에 담은 이 영화 또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감각의 제국>의 프랑스 등급은 16세 미만 관람불가, <키즈>는 12세 미만 관람불가였던 것! 프랑스는 대체 어떤 나라이길래 이렇게 노골적인 영상물에 이렇게 후한 등급을 부여하는 것일까, 영화 그 자체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키즈>와 같이 북미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NC-17(17세 미만 관람불가)'를 받았던 <쇼걸 Showgirls(1995)>도 프랑스에서는 12세 미만 관람불가였다.
키즈(1995) - 질풍노도(疾風怒濤) ※ 글 내용 중에 영화 <키즈(1995)>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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